세상은 그렇게 굴러간다. 삶은 옮고 그름이나 일의 가치를 기준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인생의 목적? 의미를 추구하는 삶? 신성한 노동? 이런 가치들은 소통하기 어렵다. 전쟁은 이런 것이 있다는 가정, 즉 정치경제적 이유와 ‘진리는 하나‘라는 확신 때문에 발생한다. (p124)
인생=길이라는 통념은 다양한 경험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된다. 상투성의 원단,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은 단지 선택하지 ‘않은‘ 삶일 뿐이다. 선택할 수 ‘없는‘ 이들에게는 갈 수 없는 길이고 이미 삶이 아니다. 외출 준비에 한나절 이상 걸리는 장애인, 여성이 피하는 밤거리, 치매와 광장공포증 환자에게 길은 도전이자 치열한 정치다. 비장애인의 걷기, 걷기 투쟁이 많지만 이진섭, 이균도 부자에게 길은 그들과 같지 않다. (p128)
모든 이의 소망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이의 평화도 가능하지 않다. 전통적인 국제정치학에서 전쟁과 평화는 같은 말이다. 평화의 어원은 침략자, 강자의 승리를 뜻한다. 공격 후 민사 작전, 다시 말해 점령 지역을 평정하여 반란을 진압한다는 뜻의 ‘pacify‘에서 ‘peace‘가 나왔다. 우리말의 평화(平和)는 1889년 창립된 ‘일본평화회‘의 기관지 <평화(平和)>에서 온 것이다. 그런 면에서 평화가 ‘peace‘보다 낫다. 하지만 ‘화(和)‘가 온누리에 ‘평(平)‘할 수 있을까. (p139)
세월호로 타살된 이들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을 삶에 대한 고민 자체를 빼앗겼다. 이 사실이 가장 나쁘다. 존재 이전에 존재의 의미를 없앤 것이다. 유목과 무명의 인생을 고민하고 설레어하고 마침내 그렇게 살다가, 홀로 황량한 언덕에 서 있는 삶도 영광이다. 삶과 죽음의 가장 큰 차이는 가능성이다. 행이든 불행이든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를 가능성. 인간은 행복이 아니라 가능성을 추구하는 존재다. 그래서 너무 일찍 죽으면 안되는 것이다. (p201)
누구나 보호받기를 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보호의 현실 또한 간단하지 않다. 세월호를 둘러싼 가장 비등한 여론은 ‘누가 우리를 보호해주냐?‘라는 국가에 대한 불신과 불안감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보호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은 위험하다. 국가가 강력한 보호자이기를 희망하는 것은 세월호의 대책이 아니라 원인에 가깝다.
기존의 보호는 보호자(주체)와 피보호자(대상)를 전제한다. 피보호자는 보호자에게 세금, 충성, 자유의 부분적 포기 같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기존 보호 개념의 가장 큰 문제는 보호자가 보호할 대상과 그렇지 않을 대상을 결정하는 권력을 지닌다는 점이다. 보호자 남성은 여성을 성(性)과 외모 혹은 아버지가 누구냐를 기준으로 보호할 가치가 있는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으로 구분한다. 보호자에게는 차별할 권리가 주어진다. 국가가 보호자일 때 국민이 어느 지역과 계급에 속했는가에 따라 보호 의지가 다르다. 지역 차별이 대표적이다. 박근혜 정권은 이마저도 아니고 "왜 그런 걸 요구하세요?"라고 반문한다.(p204)
의지는 적재적소의 미덕이 가장 중요하다. 그렇지 않은 의지는 재앙이다. 지나친 의지, "하면 된다. 안 되면 될 때까지."는 목표가 무엇이든 바람직하지 않다. ‘열심‘은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주변에 그런 사람이 많아서일까. 내게 ‘열심‘은 치열하거나 성실하다는 의미보다 완장 차고 설친다는 인상이 강하다. 환경 파괴는 덤이다. (p214)
처음 한자를 배울 때 좋을 ‘호(好)를 이해하는 방식은 대개 "남자랑 여자랑 있으면 좋다."다. 배병삼의 지적이 없었더라면 나도 계속 그렇게 알았을 것이다. 1899년 발견된 갑골문에 따르면, 고대인들은 여성이 어린 자식을 가슴에 끌어안고 꿇어안아 있는 모습(好)을 좋음, 사랑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글자라고 한다. 남자와 여자가 아니라 어머니와 자식이다. 유고의 장례인 삼년상(三年喪)은 ‘好‘, 즉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다.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 -일상의 질서가 무너지는 느낌에 주목하는 것. - 상실감의 고통, 황폐한 심정, 다시 만날 수 없는 공허감을 느껴보길 촉구하는 의례가 삼년상"이다. 어미와 자식이 껴안고 있다가 한 사람이 사라졌다. 부정하고 싶은 이 상황을 실감하는 과정이 삼년상이요, 시묘다. 삼년상은 유아기 3년의 절대적 의존 기간에 근거한 것이며 꼭 3년일 필요는 없다. (p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