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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왈님의 서재
  • 하루는 죽고 하루는 깨어난다
  • 이영옥
  • 10,800원 (10%600)
  • 2022-10-30
  • : 76


8년 만에 시집이 나왔어요.

자그마치 8년이나 되는 시간을 67편의 시에 어떻게 오그려 넣었을까요.

100개월 가까이 되는데 67편이면 1편에 1~2달씩 걸렸다는 소리잖아요.

조심스럽게 표지를 열고 오래된 시간의 벽돌 속으로 들어가요.

한 시인의 시간이 뜨거움을 이겨내고 빛나는 블록으로 차곡차곡 쟁여져 있을 거라 확신하면서.

근데 8년이라는 시간을 이렇게 짧은 시간에 알현해도 되는지 싶네요.

시에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자 역시 어려운 메타포가 손을 뿌리치지만 빛나는 시어에 힘입어 재갈이 풀린 망아지처럼 가속이 붙습니다.

 

8년 만이라는 시간(詩間)을 1시간 만에 꿀꺽하고 나니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네요.

깊다는 것은 기본이고 바닥이 보이지 않으니 깊이를 짐작할 수가 없네요.

어려운 단어가 많은 것도 아닌데 요즘 집값처럼 바닥이 보이지 않아요.

무작정 들어갔다가는 익사할지도 모르니 일단 후퇴.

 

곁에 두고 조금씩 8년의 시간을 곱씹어보면서 시의 행간과 공백보다는

시와 시의 행간과 공백을 읽으려 애를 써보렵니다.

8년의 시간을 손 놓고 있지는 않았구나하는 생각이 드는 시간(詩間)과 시어들

빛나는 표현에 줄을 긋다가 하도 많아 줄 긋기를 포기했어요.

좋은 시를 접다가 이것도 포기해야만 했어요.

 

부디 평범함을 가장한 이 시집이 시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시 읽는 기쁨을,

그리고 악플러들에게는 빈틈을 찾지 못하는 괴로움을 선사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염소나 국그릇 행성 같은 시들이 그간 이영옥스러운 시였지만,

남극을 제외한 세상의 끝 아리헨티나의 우수아이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차로 30시간쯤 걸리는 국제공항이 있는 작은 마을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여,

이 시를 읽으며 리뷰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우수아이아 _이영옥

 

하루에 열두 번 국경을 넘었다

크고 작은 문을 꼭 잠그며

온갖 생각들이 한데 감겨

커다란 실꾸리처럼 길 위에 멈춰 있다

길 끝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선물한 천 길 낭떠러지가 있었다

 

지구 끝까지 떠밀린 힘을 생각했다

억압과 저항 사이에 당신은 서 있다

곧 부러질 듯이

 

하늘도 저녁이면 심장이 터져 붉게 물드는데

점점 고체가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두드려도 문은 열리지 않고

눈앞에서 거만하게 열쇠를 흔들어대던 시간

 

사랑을 잃고 난 뒤

햇빛이 얼마나 우리를 생각했는지 수시로 떠올려야 했다

나보다 먼저 끝에 온 지평선이 몸을 지운다

 

누군가 오래 걷는다면

만날 수 없는 것을 만난 후

자신으로 돌아가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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