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강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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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용을 떨쳐 이름이 높았던 전국시대 조(趙)나라 장수 염파(廉頗)가 어느새 늙어버린 시절. 그는 조 나라 조정이 더 이상 자신을 중용하지 않자 위(魏)나라로 떠난다. 그래도 그는 고향을 그리워 했다. '기회는 다시 오겠지'. 그런 꿈을 간직한 채 그는 세월을 기다렸다.
조 나라의 사신이 어느 날 그를 찾아왔다. 옆에 있는 진(秦) 나라가 걸핏하면 시비를 걸어왔기 때문이다. 염파의 능력을 떠올린 조 나라 조정이 그가 과연 늙었는지, 전쟁을 수행할 능력은 아직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사람을 보낸 것이다.
진 나라는 염파의 재기용을 우려했다. 늙었어도 그만 한 장재(將材)를 갖춘 사람이 드물다고 생각한 것이다. 진 나라는 중간에 조 나라의 사신을 매수했다. 제대로 된 보고를 올리지 말라는 주문이었다.
염파는 사신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억지로 밥을 많이 먹는다. 한 말의 밥에 열 근의 고기를 먹어 치운 그는 갑옷을 걸쳐 입고 투구를 쓴 뒤 말에 오르는 장면을 연출한다. 젊었을 적 기력이 그대로 남아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러나 매수된 사신의 보고는 엉뚱하게 그를 묘사한다. 식사량은 적지 않지만 같이 앉아 있는 동안 '화장실'을 세 번이나 다녀올 정도로 늙었다는 것이다. 조 나라는 당연히 그의 재기용을 포기했다.
'사기(史記)'의 열전에 나오는 '염파가 밥을 억지로 먹다(廉頗强飯)'는 내용의 고사다. 그 뜻은 대개 늙은 사람이 국가를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하는 경우를 말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시세에 맞지 않는 노력, 철이 지나 쓰임새가 맞지 않는 것을 새로운 사물이나 상황에 적용하는 행위를 풍자한다.
요즘 우리 정치판이 원로 정객들의 복귀를 주문하고 있다. 말로 그저 뜻을 내는 정도가 아니라 '모셔 오기' 경쟁이 치열하다. 한나라당 대선 주자들은 YS를 비롯한 퇴역 정치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서로 과도한 신경전을 벌일 정도다. 자신의 과거 표밭에 아들의 보궐선거 출마를 허용한 DJ는 통합신당파가 신주 단지 떠받들듯이 모시는 귀한 존재다.
과거 정치인들이 정말 조 나라 장수 염파 정도의 효용이 있는 사람들일까. 이들로 하여금 억지로 밥을 먹고 갑옷과 투구를 걸치게 하는 분위기는 옳은 것인가. 지역주의의 부추김, 권모와 술수의 운용이라는 면에서 퇴역 원로들의 능력을 높이 사는 것이라면 그 정치는 매우 퇴행적이다. 새 정치는 새 인물, 새로운 생각으로 하는 게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