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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민의 서재
  • 자발적 복종
  • 에티엔 드 라 보에시
  • 8,100원 (10%450)
  • 2015-02-06
  • : 1,798

자발적 복종이라...

제목을 첨 봤을 때, 왠지 모를 이 불편함 느낌.

복종이란 말자체도 좀 거북한 데 자발적이라니.

 

사람은 스스로 누군가에게 복종하기를 원치 않으며,

복종을 강요당해 불가피하게 받아들일지라도 심한 굴욕감을 느끼게 될 거다.

때문에, 어떻게든 이 굴종의 상태를 벗어나려할 거라 생각해왔다.

그런데 자발적으로 복종을 하다니, 무슨 소리.

하지만, 라 보에시는 지금껏 많은 사람들이 알아서 기었다고 한다.

마치, 첨엔 푸른 초원을 자유롭게 달리던 말이었으나

어느 새 길들여져 얌전해진 마구간의 말처럼.

 

그럼, 왜 우린 자발적으로 복종하는가?

라 보에시는 ‘습관’과 자유에 대한 ‘망각’때문이라고.

인간은 원래 자유롭게 태어났고 자유를 갈망하는 존재였으나,

어느 순간부터 자유를 망각하고 살아간다. 애초에 자유란 없었던 것처럼.

첨에는 강요된 힘 앞에 눌려 굴종하지만, 오랜 시간 지속되면 순응하게 된다.

이렇게, 앞선 세대를 이은 다음세대들은 현실의 종속관계를

세상의 순리라 받아들인다.

 

라 보에시는 권력자를 향한 복종을 불길로 날아드는 나방에 비유한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의 화려함에 취해, 스스로 날아들어 죽음을 맞는 불나방처럼,

처음엔 두려웠으나 어느 새 동경의 대상이 돼버린 권력자를 향해

자유라는 땔감을 안고 그의 품안으로 뛰어드는 복종을 감행한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스스로 사그라들어 초라한 한줌 재로 남을 것을.

 

이 책을 읽다보니 문득 떠오른 글 하나, 인터넷에서 우연히 봤던.

우리에게 <홍길동전>으로 알려진 허균이 쓴 글 <호민론>.

이 글에서 허균은 조선시대 백성을 세 부류로 나눴다.

 

먼저, 항민(恒民)이다.

이들은 체념하고 순응하는 사람들이다.

아무리 억압받고 착취당해도 묵묵히 받아들이는.

아니, 당연한 거라 생각하기에 억압과 착취라는 인식마저 못하기도 한다.

이들에게 세상은 원래 그런 거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그저 나와 내 가족 삼시세끼 먹고 살면 다행이지.

 

다음으로 원민(怨民)이다.

이 자들은 세상과 권력자에게 불만을 품고 있다.

기대한 만큼 얻는 게 없을 때 뒤에서 투덜거리고 욕을 해댄다.

그러다가 떡고물이라도 생기면 언제 그랬냐는 듯 권력자를 열렬히 지지한다.

남이야 무슨 부당한 일을 당하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던,

내게만 이익이고 나만 성공하면 그만이다.

 

마지막은 호민(豪民)이다.

이들은 세상이 잘못되어 간다는 걸 직감한다.

잘못을 바로잡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평소엔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묵묵히 각자 생업에 종사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준비하면서 때를 기다린다.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면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앞장선다.

 

만약 지금이 조선시대라면 나는 어디쯤 속할까?

 

허균은 말한다.

항민과 원민은 지배계층이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부류라고.

그들이 정말 두려워해야할 사람들은 바로 호민이라는 거다.

세상엔 언제나 다수의 항민과 원민, 그리고 소수의 호민이 존재했으며

세상을 바꾸는 것은 항상 이 소수의 호민이었다고.

그때도 무임승차가 많았나보다.

 

허균은 이 글에서 권력층을 향해,

권력의 유한함을 깨닫고 이 호민들이 행동에 나서기 전에

‘정치 똑바로 하라’고 경고의 메시지를 날린다.

동시에, 지배계층의 부패를 막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선

백성이 깨어있어야 한다는 정치적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깨어있는 백성, 즉 호민의 현대판 버전은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쯤 될 것 같다.

 

라 보에시와 허균. 두 사람은 16세기에 태어났다.

동시대를 살다갔지만, 프랑스와 조선이라는 공간적 거리가 말해주듯

서로의 존재조차 몰랐을 이 두 사람.

그런 두 사람이 400여 년 전, 그 서슬 퍼런 왕조시대에

이런 발칙한 발상을 하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선각자란 말은 이런 사람들을 위해 생긴 말인가 보다.

 

라 보에시와 허균의 글을 지금 내가 읽을 수 있는 건 행운이다.

좋은 글을 남겨준 그들에게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든다.

그리고 블로그에 좋은 글을‘자발적’으로 올려 남들이 볼 수 있게 해준,

어느 이름 모를 불로거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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