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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민의 서재
  • 숫자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는가
  • 로렌조 피오라몬티
  • 4,500원 (10%250)
  • 2015-06-20
  • : 3,236


매일 찜통이다. 이럴 때 쫌 시원하게 지내자고 설치한 걸 텐데,

이름값도 못한 채 거실과 벽 한켠을 장식하고 있는 에어컨.

내가 그의 전원을 켜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가구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버튼을 눌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가전이 되었다.

젠장, 이 무더위에도 보통가정집은 대개, 맘 놓고 켜지도 못할 듯싶다.

호환마마보다 더 무섭다는 전기세폭탄 땜에.

 

전기요금 누진제가 연일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70년대에 누진제를 도입할 땐, 서민들보단 부자들이 전기를 더 많이 쓰니

부유층 전기사용을 억제하고, 기업에겐 전기를 싸게 공급해줘

경쟁력을 키운다는 목적도 있었다지만, 글쎄.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했는데, 아직도 그때 논리를 들이대며

40년도 넘어 유통기한 지난 누진제를 계속 유지하겠단 건,

시대착오적이거나 빤히 속보이는 짓일 뿐이다.

 

요즘처럼 전기사용량이 급증할 때면 단골로 등장하는 게 전력위기다.

전력예비율이 위험해져 대규모 정전사태, 블랙아웃이 일어날 수 있으니

국민 니들 전기 좀 아껴 쓰라는 소리.

우리 국민1인당 전기소비량이 선진국보다 더 높네 어쩌네 하면서.

정부가 한마디 하면 언론이 열심히 받아쓰고 나발을 불어대곤 한다.

이 주장에 쐐기라도 박으려는 듯, 전문가 인터뷰도 살짝 곁들여주시고.

이 때 근거로 내미는 게 바로 숫자, 이런저런 통계수치들.

 

사실 숫자란 게, 신뢰감을 갖게 하는 묘한 힘이 있긴 하다.

구체적 수치를 들이대며, 니들이 분에 넘치도록 너무 헤프게 쓴다고 하니

진짜 그런 거 같고 왠지 손가락질 받을 짓이라도 한 거 같다.

설마 전문가가 없는 소리야 하겠어.

통계수치 자체는 팩트일 거다. 물론 조작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숫자가 주는 신뢰감 뒤에 왜곡이 숨어있을 수 있다는 게 함정.

원하는 결론을 끌어내기 위해, 적당히 마사지하고 해석한 그럴듯한 수치에

그만 깜박 넘어가 설득당하기 십상이다.

 

국민1인당 전력소비량이란 게, 전체소비량에다 인구수를 1/n로 나눈 평균값.

국가 전기소비량을 1인당으로 통계를 내면, 소비주체가 개인이 돼버린다.

기업이 쓴 전기도 개인사용량으로 전가되니 1인당 수치가 올라갈 수밖에.

전력위기 주범이 개인들인 거 같은 착시현상이 일어나게 한다.

 

하지만 실상은 기업 전기사용량이 55%, 가정용은 13%에 불과하다.

울나라 가정집은 OECD평균의 절반에도 못 미치고 선진국의 1/3수준.

근데도 가정용에만 누진제를 적용해, 실제계산에선 40배 넘는 요금도 가능하다.

기업용은 시간과 계절별로 깎아주기까지 하면서.

지난 3년 동안 20대 기업한테 퍼준 전기료가 3조원 넘고, 삼성전자 하나에만

4천억이 넘는 혜택을 줬다. 결국 가정용에 누진세폭탄 때려 폭리를 취한 돈으로

기업용 전기요금 대신 내준 꼴, 근 50년 가까이나.

 

누진제 땜에 냉난방도 아끼며 사는 개인들 입장에선, 전기세폭탄도 열받는데

억울한 누명까지 뒤집어쓴, 이 무슨 골때리는 경우인지.

이건 마치, 국민1인당 소득이 곧 3만달러 돌파한다고 호들갑 떨면서

이 평균수치에 못 미치는 개인들을 향해, 니가 무능하고 게으른 탓이라고

뒤집어씌우는 것과 비슷하다할까.

3만달러면 4인가구 연소득이 1억을 훌쩍 넘는단 소린데,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소리다. 기업이 벌어들인 총수입이 늘었다고 해서

모든 개인들 소득으로까지 이전되는 건 아니니까.

안 그래도 푹푹찌는 날씨 땜에 열받는데, 교묘한 수치장난이나 해대며

전기 아껴쓰라고 하니 더 빡친다.

 

요즘 웬만한 가정집에서 쓰는 가전제품이 옛날보단 훨씬 많아졌다.

초등생들도 휴대폰 하나씩 들고 다니는 세상인데.

보통사람들이 전기를 사용하는 건, 생존과 생활에 필요해서지

사치를 과시하기 위함이 결코 아니다.

전기사용량이란 게, 아무래도 식구가 많을수록 늘어날 수밖에 없지 않나.

1인가구가 아니고서야 1단계를 넘지 않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단 얘기.

부자들보다 전기를 더 적게 쓴다 해도, 서민들이 실제 느끼는

전기요금에 대한 부담감은 더 클 수 있다.

생계비 중 식료품비가 차지하는 비율을 나타내는 엥겔계수처럼.

 

도 닦는 수도승이나 길거리 노숙자가 아니라면 불가능할 것만 같은

금욕적 생활을 강요하는 나라.

이걸 견뎌내지 못하고 1단계를 초과하는 전기를 쓴 헤프디 헤픈 가정에

징벌적 누진제로 단죄하는 대한민국만의 도덕적 요금체계에서 살아가려면,

보통사람들에겐 보통이란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 비범한 능력이 요구된다.

 

그 옛날, 천장에 매달아놓은 굴비를 바라만 봐도 혀를 자극하는

짠맛의 느낌만으로 밥 한그릇은 걍 뚝딱 해치웠다는 자린고비처럼,

정상적인 멘탈로는 이를 수 없는 경지에 오른, 그 신통방통한 능력.

에어컨을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온 몸에 소름돋는 서늘함을 느낄 수 있는,

시각과 촉각이 동시다발적으로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그 공감각적 능력이.

 

이 더위가 물러가고 추위가 찾아오면, 우린 또 한번 그 쩌는 능력을

발휘해야만 할지도 모르겠다.

조그마한 성냥불 하나에도, 벽난로에서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을 떠올리며

추위를 잊은 성냥팔이 소녀처럼, 보일러 펑펑 돌린 듯

등짝에 땀이 삐질삐질 흘러내려 준비해둔 내복 입어볼 기회는 언감생심,

웃통까지 벗어 제켜야할 것만 같은 후끈함을 느끼는 그 상상력을.

 

이런 상황에서도 혹, 정치가 나랑 뭔 상관이냐는

불굴의 신념과 강인한 멘탈을 소유하신 서민이 계시다면,

전기세폭탄 끌어안고 장렬하게 산화하시던가.

 

산산이 부서진 지갑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지갑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지갑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지갑이여!

 

것도 아님, 이담에 애국훈장과 함께 국립묘지에 안장될지도 모를

영광스런 꿈을 위안삼아 사시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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