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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민의 서재
  • 진보와 빈곤
  • 헨리 죠지
  • 22,500원 (10%1,250)
  • 2016-07-15
  • : 4,160

어릴 때 동네아이들과 하던 놀이 중에 ‘땅따먹기’란 게 있었다.

더 많은 땅을 차지한 쪽이 이기는 놀이다.

나와 비슷하거나 윗세대 중엔 알지도 모르겠다.

요즘 아이들은 아마 알지도 해보지도 못하겠지만.

지금은 집 앞 골목에서 맨땅을 보기 힘들지만, 

그 땐 손에 흙 묻혀가며 놀 수 있는 땅이 꽤 있었다.

 

이 책은 땅 이야기다. 책을 읽으면서 문득, 어릴 때 하던 그 놀이가 생각났다.

왜 하필 땅따먹기 놀이를 하며 놀았을까?

철부지 동네꼬맹이들이 즉석에서 그 놀이를 생각해낸 건 아닐거고

더 나이 많은 누군가 가르쳐줬을 텐데.

땅을 갖고 싶은 심리가 놀이에도 반영된 걸까?

이때부터 땅에 대한 애착이 무의식적으로 심어진 걸까?

아이들이 자라, 더 많은 땅을 획득하는 데 필요한

감각과 본능을 길러주기 위한 어른들의 깊은 뜻이 담겨있는 걸까?

별생각을 다 하고 앉았다. 내 어릴 적 순수한 동심의 추억을 

오염시키진 말기로 하자.

 

이명박정권 시절, 한 공직후보자가 땅투기 의혹을 받고 있었다.

인사청문회에서, 이 의혹에 대해 집중추궁을 받자 후보자는

“ 단지, 땅을 사랑했을 뿐”이라 답했다.

만약, 헨리 조지가 살아 후보자 답변을 들었다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땅을 사랑한 게 아니라, 땅이 주는 불로소득을 사랑한 거겠지.”

이 아줌마도 혹시 어릴 때 땅따먹기 하고 놀았나?

 

헨리 조지가 살던 시대는 산업혁명 후 생산력이 이전보다 월등히 높아져가는

때였다. 그러나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하는 ‘진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빈곤’이 발생했다.

생산에 필요한 노동이라곤 하지도 않는 소수부유층은

더 호화롭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하루 종일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다수민중들은 

생존최저임금만 받는 궁핍한 삶을 계속 살아야만 했다. 

이유가 뭘까?

헨리 조지는 이런 불평등의 근본원인을 땅에서 찾는다.

바로 땅이 주는 불로소득에서.

 

지구라는 별에 사람이 살기 전부터 땅이 먼저 있었다.

누구의 것도 아니었던 이 땅이, 언제부턴가 누군가의 소유가 되기 시작했다.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건 모두의 것이라는 말도 된다.

공유재였던 땅이 사유재가 되면서 모든 불평등의 싹이 트기 시작한다. 

땅을 더 차지하기 위해선 온갖 불의와 부정도 불사한다.

 

헨리 조지는 이 책에서, 토지사유제는 정의롭지 않다며 자신의 주장을 펼쳐나간다.

자연은 상속무제한 토지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토지의 배타적 소유를 정당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 권한은 어디에도 없다.

현재의 모든 인류가 합의해, 토지에 대한 자기들의 평등한 권리를 포기한다해도

후세대의 권리까지 포기할 순 없다.

인간은 지구에 임시로 세 들어 사는 자에 불과하지 않은가?

후세대가 세 들어 살 권리를 우리가 대신 결정하다니,

도대체 우리가 지구를 만들기라도 했단 말인가?

 

현실에서 부의 총량이 증가하는 물질적 진보가 나날이 이루어지는데도

빈곤이 사라지지 않는 진정한 이유는,

생산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 지주가 비싼 지대를 차지하는 걸 합법화한

토지사유제 때문이다. 빈곤을 타파하려면 토지사유제를 없애야한다.

그러나 이미 토지사유제가 관습화된 나라에서는

토지를 공유화할 필요까지는 없고, 단지 해마다 정부가 지대를 환수해

사회가 공유하면 된다. 지대조세제 개혁은 생산을 증대할 뿐만 아니라

분배정의도 제고한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계층에 이익이 되며 

더 높고 고상한 문명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효과도 있다.

 

오늘날 들어도 파격적인 주장이다.

하물며, 19세기에 헨리 조지의 이런 주장을 들었을 지주와 지배층에겐

청천날벼락 같은 소리였을 거다. 입에 거품 물고 뒷골 땡겨,

경기 일으키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들에겐 굉장히 위험한 사상이고 가만 내버려둬선 안 될 놈이었을 거다.

그 바람에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지만.

하지만 헨리 조지의 사상은 많은 사상가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고

오늘날까지도 경제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헨리 조지의 사상에 공감하고 전파하고자

죽을 때까지 노력했다. 자신의 소설 <부활>에서 주인공 네플류도프를 통해

‘지대공유제’를 설파하고 실천하는 모습을 그렸다.

아인슈타인과 헬렌 켈러도 헨리 조지에게 지지와 경의를 표했다.

 

땅과 물과 공기는 인간이 만든 게 아니다. 하늘이 준 선물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누구든, 이 자연이라는 선물을

평등하게 향유할 권리가 있다.

설사 황무지를 먼저 개간해 비옥한 땅으로 만들었다 해도,

자자손손 그 땅 소유권까지 보장해선 안 된다는 거다.

땅 그 자체는 자신의 노력으로 만든 게 아니고, 그 사회구성원 모두의 것이며

미래세대의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자신의 노력으로 이룩한 비옥한 토지에서 생산한 결실은 본인이 소유한다.

하지만 그 땅을 계속 이용하려면, 그에 합당한 지대를 냄으로써

사회공동체를 위한 환원을 해야 마땅하다.

 

토지를 먼저 소유했다는 이유만으로, 거기서 발생하는 모든 부를

지주 혼자 독차지하는 건 부당하다는 얘기다. 우리나라 예를 들어보면,

지금 이 나라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곳 중 하나인 강남은

원래 허허벌판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곳의 개발정책을 확정하고 국가차원의 엄청난 세금을 투입한다.

도로와 전기, 수도, 학교와 공공기관 같은 인프라가 갖춰졌다.

사람이 살기 편리한 곳이 된 거다. 이러면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사람들이 모이면 각종 상업이 번창하게 되고 경제의 중심지가 된다.

당연히 토지가치도 대폭 상승한다.

이렇게 상승한 가치가 땅주인의 노력으로 발생한 것인가?

헨리 조지의 관점에서 보면, 토지가치가 상승하고 더 많은 부를 창출하는 건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하는 사람들과 국민세금을 투입한 결과다.

사회구성원들이 기여한 덕분이다. 그런데 단지 땅주인이라서 합당한 몫 이상의

부를 가져가는 것은 불로소득이라는 거다.

바로 이 불로소득을 보장함으로써 빈부의 격차가 계속 커지고,

이것은 정의롭지 못하다.

지대공유제를 통해 이 불로소득을 환수하고 진보의 혜택이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곧 분배정의다.

 

헨리 조지는 19세기에 살던 사람이다. 모든 불평등의 근본적 원인을 

토지소유권에서 발생하는 불로소득에서 찾았다.

21세기는 토지뿐만 아니라 금융자본에서 발생하는 불로소득 또한 

심각한 지경이 됐다. 

부동산과 자본은 세습되고 부의 대물림은 학력의 대물림으로 이어진다.

기회는 평등하지 못하고 경쟁의 과정은 공정하지 못하며 결과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가 돼가고 있다. 

이런 사회는 서로를 믿지 못하고 미워하며 갈등을 유발한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헨리 조지의 사상이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는 건

그가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갈망했고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평생을 바쳤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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