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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애니메이션 오타쿠의 작은 비평공간
  •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 장 자크 루소
  • 18,000원 (10%1,000)
  • 2007-09-30
  • : 223

루소가 자신의 답답하고 피로한 마음을 담은 자서전인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 – 대화> 저술 이후, 다시 루소가 자신의 자서전을 낸 도서가 바로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이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읽은 후에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 – 대화>와 비교해보면 상당히 다른 문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 – 대화>의 경우 자신의 대한 의견을 매우 강렬하고도 열정적으로 내뿜는 것이라면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의 경우 아주 잔잔한 호숫가에 떠돌아다니는 작은 돛단배와 같다.

 

루소의 생애가 이제 60이란 초로에서 죽기 전까지 저술한 이 고요한 자서전은 루소의 인생을 마무리하면서 자기가 살아온 가치와 목표, 세상풍파를 이래저래 몽상가처럼 적어 내린다. 루소라는 인물은 상당히 소요학파적인 인물이다. 그의 소요에서 자연과 벗을 하며 조용한 숲속에서 걸어 다니는 산책이란 것이 그의 몽상을 활발하게 해주었다. 그에게 남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이 자신이 언제라도 빠질 수 있는 몽상의 세계였다. 그 몽상은 현실에 대한 도피보다는 그 현실 속에 대한 초월이었다.

 

루소는 이 서적에서 논하고 있지만, 상당히 프랑스에서 특히 파리라는 곳에서 심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에밀>과 <사회계약론>은 공개된 장소에서 화형이 되었다. 그의 도서는 금서가 되었고, 그의 존재는 모든 사람들이 제일 두려워하면서도 가장 우습게 된 악마가 되었다. 산책에서 몽상에 빠진 그의 글을 보면, 루소는 한 번 죽음을 당할 뻔 했다. 길가를 지나가다가 어느 큰 개와 부딪히는 바람에 길에서 쓰러졌다. 그는 넘어지면서 다리부터 지면에 닿을 것이 아니라 머리부터 닿았다. 그 덕분에 기절을 했다.

 

게다가 그 개와 충돌 직후 마차가 달려오고 있었고, 마부가 조금이라도 늦게 확인했다면 마차의 수레바퀴가 루소가 가진 숙명의 수레바퀴를 멈추게 했을 터이다. 다행히도 마차는 자기 자리를 지켰고, 루소는 사람들에 의해 구해진다. 그러나 심하게 부딪힌 것인지 루소는 고통마저 느끼지 못했다. 아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여 사람들이 “당신 집이 어디입니까?”라는 질문에 오히려 “여기가 어디죠?”라는 발언을 했으니 말이다.

 

루소는 그 개와 부딪히면서 자신의 죽음과 같은 삶에서 오히려 삶이 있다는 반전되던 상황을 맞이한다. 그러나 세상은 루소를 다시 음모와 같은 루머로 그를 괴롭혔다. 루소는 직접 사람들이 자신을 괴롭히는 것보다 그를 괴롭히겠다는 보이지 않은 악의를 더욱 무서워했다. 너무 많은 도망과 망명, 조롱 속에서 그는 외로움 속에서 마음이 병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럴수록 루소는 자신에 대해 당당했다. 얼마나 당당했을까?

 

루소가 개와 부딪히자 루소가 크게 다쳤다는 소문이 조금씩 나돌았고, 심지어 루소가 그 사고로 죽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당시 프랑스 왕 루이 16세가 루소의 죽음을 왕궁에서 들었다고 하고, 심심하면 루소에게 파리 경찰부청장 부관이 와서 확인한다고 하니 그의 인생은 이미 자유라는 단어가 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루이16세는 루소가 만든 사회계약론을 들고 다닌 로베스피에르와 그 일행에 의해 목이 무참하게 분리된다.

 

모든 프랑스 국민들이 그를 조롱하고, 모든 파리 시민들이 그를 외톨이로 만든다. 그래도 루소는 자신의 세계를 더 넓힌다. 자연을 찾아 숲속과 호수를 돌며, 숲속에 혹은 거리에 있는 풀과 꽃에 애정을 보인다. 루소는 식물학에 대해 관심이 참 많았다. 그는 풀과 꽃에 대한 유용적인 경제성보다는 그 풀과 꽃에 대한 그 자연적인 부분을 좋아했다. 겉치레로 이루어진 것들을 외면하고, 동물을 무참하게 죽이거나 또는 벌레나 곤충에 핀을 꽂는 것도 싫어했다. 그저 풀과 꽃을 보면서 마을에 위안으로 삼았다.

 

루소에겐 사람에 대한 증오와 분노보다는 오히려 그 분노와 증오를 받아들이어 그것으로부터 초월하려고 했다. 자신의 최고 무기인 ‘말의 포탄’은 더 이상 남발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말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특히 루소가 사랑스럽게 대하던 아내 테레즈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었다. 루소는 그 시련과 고통 속에서 힘들었지만, 그가 사랑하던 아내인 테레즈는 오죽할까? 아니 두 사람에게 태어난 다섯 명의 아이들 역시 그랬을 게다.

 

하지만 루소는 <에밀>에 적은 것처럼 아이들에 대한 교육은 억지로 해서는 안 되고, 특히 부모에 의해 망치지 않아야 한다며, 자신의 자녀 모두 고아원에 맡긴다. 어떻게 보면 세견의 말처럼 그는 무책임하고 무관심한 아버지처럼 보이나, 루소는 자신의 아이를 매우 사랑하며, 심지어 길가에 걸어가는 아이들까지 사랑스럽고 그들의 친구처럼 살았다고 고백한다. 길가에 어느 남자아이가 간식을 먹고 싶어 그에게 용돈을 주고, 그 아이의 아버지에게 가서 대화하려고 한 사례는 그가 분명히 아이들에 대해 사랑 없는 사람이 아니란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못하다. 루소는 언제나 파리의 경찰들이 보낸 염탐꾼에 의해 감시되었고, 그 감시꾼들은 그 남자아이를 만난 루소가 그 남자아이의 아버지를 만나려는 것을 방해했다. 마치 루소가 그 아버지에게 먼저 가는 것을 못마땅한 듯 번개 같이 뛰어가니 말이다. 루소에겐 인간은 모두 소중한 존재였다. 특히 어리고 가여운 아이들이라면 루소에겐 그들의 얼굴에 미소를 보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었다.

 

루소에겐 그 미래에 대한 미소를 만들 수 있는 세상이 되길 바란 것 같았다. 루소는 자신이 살던 시절에 결코 자신의 책이 용납되지 않음을 알았다. 자신의 서적은 언젠가 볼 먼 훗날을 기약했다. 그 훗날이 오면 루소가 애지중지하던 아이들이 어른이 된다는 점이다. 루소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읽다보면 가난한 남자아이의 모습이 나온다. 굴뚝에서 일하는 어린 남자아이들에게 사과를 사주던 루소는 자신이 사줬던 사실보단 그들의 미소로 통해 위안을 삼는다. 그것은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어느 구절을 보면 루소의 소망이 보이지 않을까?

 

“어떤 한 사람의 특권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허다하다. 개인의 이해는 거의 언제나 공공의 이해와 맞선다.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자신이 이야기하는 상대방의 유용성을 위해 타인들의 유용성을 희생시켜야 하는가? 어떤 한 사람에게는 유리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해가 되는 진실을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말하지 말아야 하는가? 사람들이 말해야 하는 모든 것의 무게가 오로지 공공의 선이라는 저울에 달아야 하는가, 아니면 배분성의 정의라는 저울에 달아야 하는가? 내가 이용하는 지식들이 형평성의 규칙을 충족시킬 만큼 사실의 모든 관계를 충분히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가? 타인에 대한 의무를 검토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와 진실 그 자체에 대한 의무에 대해 충분히 검토해 보았는가? 타인을 속일 때 그에게 아무런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해서 나 자신에게도 아무런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어떤 경우에도 결백하기 위해서는 부당하지 않은 것만으로 충분한가?”

 

루소의 글에 나온 것을 보면 자유에 대한 권리와 책임, 의무를 생각하는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이라면 반드시 새기고 또 새기야 할 글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루소의 사상을 엄청난 위력을 끼쳤다. 저 글은 민주주의에서 여러 가지 사고방식 중인 공리주의적인 요소를 다룬다. 민주주의는 공리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시민주의, 방임주의, 공화주의 등등이 이래저래 섞여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관용이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중요한 관점이다. <사회계약론>에서 인간은 자유로우나 사회에서 구속받을 수밖에 없기에 인간이 사회성을 유지하기 위한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 사고방식이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무서운 책 속의 문구란 점이다. 루소가 살아온 현실에서 그가 기대하는 세상은 현실에 없다. 오로지 자신만의 세계에서 명상과 몽상을 꿈꾸길 위해 루소는 언제나 산책을 떠난다. 심지어 그가 이 책 10번째 마지막 미완의 글을 적을 때도 산책을 나간다. 그의 산책은 세상과 루소의 싸움이 아닌 루소와 장 자크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그 싸움은 산책에서 모두 해소되어 편안한 일상을 마무리한다.

 

그래서인지 루소의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은 왠지 모르게 갑작스럽게 보는 것보단 차라리 과연 그렇게 되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루소는 삶의 경험에서 죽음에 대해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죽을 때 자신이 가진 온갖 재물과 재산에 집착하는 자들에 대해 어리석게 여겼다. 삶과 죽음은 하나라고 말하는 소크라테스나 인간은 태어나면서 죽어간다는 하이데거나 매한가지로 볼 수 있는 게 아닐까? 그의 글을 적어보면,

 

“청춘기는 예지를 배우는 시기다. 노년기는 그 예지를 실행에 옮기는 시기다. 경험은 언제나 교훈을 준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은 각자 자신 앞에 남은 생의 기간에 대해서만 유익할 뿐이다. 죽어야 할 바로 그때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워야 할 때는 아니잖은가?”

 

그러면서 루소는 이제 초로의 나이에 배워야 하는 것들은 자신이 바로 죽어야 하는 것이다. 삶이 고뇌와 절망이라도 루소는 삶으로부터 도망치거나 회피하기 위해 죽는 것이 아니라 단지 죽음 그 자체를 받아들인다. 지나친 삶에 대한 집착이나 가진 것들에 대한 집착에서 말이다. 그의 산책에서 얻은 몽상이란 루소로 향하는 모든 것에 대해 루소가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스스로 정리함으로 생을 마감하려 했다. 루소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보아도 돌아오는 것은 냉소어린 비난과 조롱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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