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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년 5월 12일 독일 함부르크 출생. 1947년 11월 20일 스위스 바젤 사망." 어떤 한 남자가 태어나서 26년을 살고 저 세상으로 떠나갔다. '볼프강 보르헤르트'란 이름을 내가 처음 듣게 되었던 것은 80년대가 거의 저물어 갈 무렵이었다. 그는 제2차세계대전 직후 독일 문학의 소위 <잃어버린 세대>의 한 사람이다. 그는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 실업학교를 중퇴하고 연극활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곧 징집을 당해 동부전선으로 투입된다. 그는 군인 신분임에도 후방으로 보낸 어느 편지에서 수백만 명의 사람을 파멸로 몰고 가는 허위에 직면해 찾아낸 진실을 썼다. 결국 그는 재판에 회부됐고, 이후에도 수 차례 더 투옥 당하는 고초를 겪는다. 이 과정에서 그의 건강은 소진된다. 종전 직후 자신이 집필한 희곡《문밖에서(1947)》의 초연 전날 짧은 생을 마감했다.

보르헤르트를 처음 만난 때가 굳이 80년대가 아니었더라도, 그 무렵의 나는 무언가 막연한 절망과 정신적 공황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이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가담했던 운동 단체가 산산조각 나고, 지하 생활자로 변해 있을 무렵이었다. 나에게 세상은 온통 사기였으며 불가능한 이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유행가 가사조차도 나의 정신 건강엔 극도로 유해했을 이 시기에 나는 《이별없는 세대》(민음사)를 잡았고, 이 책의 몇 구절인가를 적어 친구들에게 엽서로 보내곤 했다.

"우리는 서로 만남도 없고, 깊이도 없는 세대다. 우리의 깊이는 나락과도 같다. 우리는 행복도 모르고, 고향도 잃은, 이별마저도 없는 세대다. 우리의 태양은 희미하고, 우리의 사랑은 비정하고, 우리의 청춘은 젊지 않다. 우리에게는 국경이 없고, 아무런 한계도, 어떠한 보호도 없다. ― 어린이 놀이터에서 이쪽으로 쫓겨난 탓인지, 이 세상은 우리를 경멸하는 사람들을 건네주고 있다."

겨우 26년을 살다간 한 청년이 냉혹한 한 시대를 견딘 상흔이라고는 할 수 없을 만큼 《이별없는 세대》는 짧지만 따뜻하고 아름다운 글들로 가득하다. 이 책은 내게 사물의 이치는 지식보다 사랑을 통해 파악된다고 가르쳐 주었던 몇 권의 책 중 하나다. 이제 나는 결혼도 하고 스무 살 무렵의 그런 열정과 절망은 잊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앞에는 아직 가보지 못한 나머지 삶이 남아 있고 갈 길은 아직도 멀다. 휴가라는 것이 몸만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쉬게 해주는 것이라면 이 책과 함께 자신의 마음속으로 잠시 휴가를 떠나는 것도 좋으리. 이 책에는 자작나무 숲 사이로 펼쳐진 드넓은 러시아의 설원과 안개 자욱한 북부 독일의 스산한 거리가 보인다. 그 어디쯤 당신이 고민하고 절망했던 시대의 기억이 숨겨져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윗글은 내가 외부잡지의 청탁을 받아 쓴 첫 원고였다. 벌써 오래전 어느 날의 일이다. 아마 이 글을 쓸 때만하더라도 나는 아직 결혼하기 전이었고, 이십대였을 게다. 스스로 늙기로 결심한 뒤로부터 나는 청탁 원고를 아직까지는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다. 지난 시절의 어느날엔가 나는 숨막히도록 뜨거웠지만, 이제 나는 더이상 뜨거울 것도, 싱싱할 것도 없는 표정으로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책들은 여전히 나를 자작나무 숲이 우거진 시베리아 벌판으로 끌어들인다.

어느 병사가 넋나간 표정으로 노리쇠가 얼어붙지 않도록 한 시간마다 한 번씩 텅빈 숲을 향해 총알을 발사한다. 조용한 숲 속으로 울려퍼지는 표적없는 총성에 놀란 겨우내 쌓인 눈들이 투둑 소리를 내며 미끄러진다. 이 책의 첫 머리에 나는 지난 1987년의 어느 날 이렇게 적어 두었었다.

"때로는 희망이 사람을 망친다."

뜨거운 바람은 남쪽으로부터 서서히 북상 중...
나는 천천히 식어간다. 차갑게 식은 코코아 처럼...

당신 스스로 너무 늙었다고 생각된다면....
절대로 이 책을 읽지 말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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