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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가기 전에 내가 이 공간에서 쓰고 싶은 마지막 서평. 키작은 꼽추 혁명가에 관한 이야기. 키작은 꼽추에 고수머리에 지극히 볼품없는 외모를 지닌 한 혁명가에 관한 이야기. 생의 마지막 10년을 감옥에서 보낸 한 사상가의 이야기. 그리고 글을 무지무지 열심히 쓰면서 참새를 길렀던 한 사나이에 관한 이야기. 러시아 아내와 결혼했고, 러시아 아내의 누이동생에게 수천 통의 편지를 보냈던 한 수인의 이야기. 공산주의 혁명을 생각했던 시골뜨기의 이야기. 추리소설과 통속소설을 아주 열심히 읽었던 한 심심한 사내의 이야기. 무솔리니가, 아니 파시즘 정권이 지독히도 두려워했던 한 키작은 사내에 관한 유쾌한 이야기. 온갖 질병을 안고 살았던 가롯 유대보다 더 끔찍한 고통 속에서 살았던 한 인간의 이야기. 한 시대, 한 무리의 인간들이 하얗게 지우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엔 지워지지 않고 매순간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이야기.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되살아나는 이야기. 글을 읽다보면, 전혀 그 작은 키와 굽은 등을 의식하지 못하게 되는 놀라운 한 사내의 머릿속에 관한 이야기. 그 시선의 그물, 그 넓고 촘촘한 시선에 관한 이야기. 냉철하고 명석한 사내에 관한 이야기. 그 냉철하고 명석한 생각이 어떻게 왜곡되어 왔는지에 관한 이야기. 아무에게나 말할 수 없었던 비밀을 미래를 향해 써댔던 한 사내에 관한 장구한 이야기. 구구한 이야기. 옥중서한과 옥중수고로 남은 사내의 이야기. 감옥에서 나와 단 3일을 자유인으로 살았던 한 혁명가의 이야기. 이야기에 매혹됐던 사상가. 혼자서 숱한 실체들과 허상들과 벽들과 매일매일 싸우고 싸웠던 한 수인의 이야기. 그람시. 이 책은 키메라 같은 책이다. 그람시와 인류학의 교잡종이다. 하지만 엉성하게 연결된 것이 아니다. 그람시의 문화이론과 인류학의 문화이론이 서로의 살과 뼈에 들러붙어 묘하게 뒤틀려 있다. 하지만 서술은 지극히 평이하고 친절하다. 구성도 아주 면밀하다. 이 책에 관한 포인트. 문화의 개념을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에 매우 유용한 참고서다. 이 책에 소개되는 인류학자들, 주로 맑스주의의 세례를 받은 학자들이다. 맑스주의 인류학학이란 것도 생길까. 모르겠다. 이름붙이면 되는 거지, 뭐. 아니, 어쩜 이미 맑스주의 계열 인류학자가 있을지 모른다. 레이몬드 윌리엄스의 <맑스주의와 문학>를 경유하면서 잘못 전해진 "헤게모니"의 개념을 교정한다. 그리고 그람시의 문화이론이 인류학자들에게 어떤 자극을 줄 수 있는지 소개한다. 책의 후반부에는 그람시의 문화이론이 어떤 영향력을 줄 수 있는지 측정하는 예시들이 나온다. 물론 그람시를 소개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람시로 글을 시작했으되, 인류학 전반, 인간학 전반으로 논의를 넓힌다. 무엇보다 이제는 시중에서 읽을 수 없는 에릭 울프(예전에 <농민>이라는 책이 나왔었지만 이제는 없는)에 관한 언급이 많아서 좋다. 도무지 <유럽과 역사 없는 사람들>과 같은 명저를 언제쯤 만나볼 수 있을까. 이 책을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이 그렇게 없단 말인가. 아무튼 이 책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운다. 그람시를 이해하는데 더없이 소중한 책으로 기록될 것이다. "우리는 이 사람의 두뇌가 20년 동안 작동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람시 재판을 담당했던 검사의 논고 중에 있던 말이다. 이 화려한 수사학으로도 그의 두뇌 작동을 꺼버리지는 못했다. 그람시와 인류학의 연결이 얼마나 매끄러운지, 관심있는 분들은 한번 들춰보시면 좋겠다. 여담이지만, 김우영이란 번역자가 옮긴 인류학 서적은 다 좋다. 감식안이 장난이 아니다. 특히 실천문학사에서 나온 <문화의 숙명>이란 책을 읽어보기를 강권한다. 이 책은 기어츠의 문화이론에 대한 각주라 할 수 있다. 셰리 오트너 여사가 엮은 이 책엔 레나토 로살도를 비롯해 나탈리 데이비스 등등의 글이 실려 있다. 이 책에 수록된 셰리 오트너의 논문 "중층적 저항-히말라야 등반을 통해 본 죽음과 행위력의 문화적 구성"은 압권이다. 오트너의 히말라야 셰르파 연구들이 잘된 번역으로 국내에 소개되는 날을 손꼽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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