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에서 노동자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어떨까? 지금 ‘철도 민영화’ 문제를 둘러싸고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이 진행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주요 언론’의 보도는 ‘국민의 발을 묶어놓는다’거나, ‘수출 물량 수송에 피해를 입히고 있다’는 식으로 일관된다. 그렇다고 노동자들이 왜 파업을 일으키게 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보도태도는 그 이전부터 줄곧 계속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몇 가지만 묻자. 그럼 노동자는 ‘국민’이 아닐까? 나는 노동자가 아닌가. 만약 내가 내 직장에서 어떤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을 때,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여기서 소개하고자 하는 책은 위에서 물었던 답을 제시해주는 책은 아니다. 그간 한국사회에서 노동자, 농민으로 대변되어왔던 ‘민중’에 대한 역사서술에 관한 물음을 제기하는 책이다. 따라서 이 책은 일반 대중들을 위한 책은 아니며, 주로 역사학이나 역사 관련 활동에 직간접적으로 몸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화와 사회변혁의 물결이 휘몰아치던 80년대 한국사회에 ‘민중사학’의 바람이 불었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민중사학’은 역사발전의 주체는 민중이며, 역사 발전 과정을 민중의 주체성이 확대되어가는 과정을 바라보고, 민중이 주역이 되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전망을 모색하는 학문경향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학문경향은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시민/민중의 분리라는 한국사회의 다변화 과정에서 과연 ‘민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의문을 받게 되었고, 학문 내적으로 주역이 되어야 할 민중이 오히려 사회경제적인 상황에 종속되는 민중으로서 그려지는, 따라서 ‘민중사학’은 엘리트 지식인에 의해 상정된 민중으로서 받아들여지게 됨으로써 1990년대 중반 이후 쇠퇴하였다.
그러다가 IMF 경제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확산이 진행되면서 사회적 불평등과 양극화는 심화하였고, 노동과정의 유연화 속에서 과거 민중사학이 내걸었던 실천성과 비판의 정신을 되살려보고자 하는 흐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이후 역사학계 일각에서 ‘새로운 민중사’를 표방하는 연구자들이 등장했던 것이다. 역사문제연구소 내 연구반인 민중사반이 그 대표적인 연구자 단체이다. 이 책은 바로 민중사반이 ‘새로운 민중사’를 내걸고 발표했던 글들을 새롭게 묶어낸 것이다.
‘새로운 민중사’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애정과 그들이 역사의 주인공이라는 믿음” 속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12쪽). 그런 관점에서 이 책에서는 ‘민중’을 투쟁하는 주체에 앞서서 일상적 삶을 살아가는 생활자로서 받아들이고, ‘민중’이 특정한 계급연합으로 나타나기보다는 다양한 구성과 정체성을 내포한 여러 목소리를 갖는 주체로서 상정한다. 또한 저자들은 민중을 권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억압받기 보다는 종속성과 자율성을 동시에 담지하고 있는 주체로서 바라보고자 한다. 이러한 각도에서 저자들은 ‘아래로부터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실천적인 역사학을 추구하고자 한다.
과거에 ‘민중사’가 가능했던 것은 노동자, 농민으로 대변되는 계급이 명확하게 ‘눈에 들어왔고’ 그들이 주체가 되고, 그들의 투쟁에 의해서 역사발전이 이뤄질 수 있다고 하는 한국사회의 조건이 존재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87년 ‘절차적 민주화’가 일정 부분 달성된 이후 사회 분화가 훨씬 심화하면서 탈중심, 다변화한 사회로 바뀌었다. 이랬을 때 그 다양한 사회적 주체를 역사학적으로는 어떻게 서술하고, 표현하고, ‘재현’해갈 수 있을지, 그러한 현실에 대한 고민이 이 ‘새로운 민중사’ 시도에 많이 녹아 있다. 그것이 이 책의 큰 미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갈 길은 멀고, 그런 고민들을 실제 역사서술에 녹아내기에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그러한 연구 결과물들을 ‘민중’, ‘대중’, ‘다중’ 등으로 표현되는 일반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하는, 그럼으로써 새로운 사회를 전망해가고 만들어갈 수 있는 일은 만만지 않다. ‘새로운 민중사’를 펼쳐나갈 때, 그것이 역사학계의 학문적인 방법론에 관한 검토에만 머무른다면 과거 민중사학에 대한 ‘실천성’에 대한 비판적 계승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새로운 민중사’가 나아갈 방향이 쉬운 것만은 아닌 상황이다. 그럼에도 세상이 바뀌려면, 앞에서 언급했던 ‘노동자’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바뀌려면(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도 지식업계에 몸담고 있는 ‘노동자’이지만^^), 이 책에서 고민하고 있는 ‘새로운 민중사’는 충분히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연구 성과들을 기대해본다.
끝으로 <미국민중사>의 저자이자 미국의 살아있는 지성이었던 고 하워드 진의 말을 인용하고자 한다.
“나는 노동자든, 유색인이든, 여자든 권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 않은 사람들이 조직하고 저항함으로써 운동을 일으킨다면 어떤 정부도 억누를 수 없는 목소리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다.” - 하워드 진, 앤서니 아노브 엮음, <미국 민중사를 만든 목소리들>, 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