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양쪽에 새로운 정부가 세워지게 되었다. 특사가 파견되고 새롭게 관계 설정이 이뤄지려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지만, 역시 한일 간에 항상 중요한 화두는 역사문제일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 양측 정부와 시민사회의 역사인식이 공유되고, 과거사 문제에 대한 상호이해가 진행될 때, 양측의 평화로운 공존도 가능해질 것이다.
한일 역사인식/역사문제와 관련해서는 이미 많은 책이 존재하지만, 이번에 이연식의 <조선을 떠나며>(역사비평사)는 좀 색다른 구석이 있어 주목된다. 이연식은 조선이 해방을 맞이한 1945년 그 직후의 일본인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면서 그 이전 식민지 시기의 조선인과 일본인의 관계, 해방 이후 한국과 일본의 역사인식 문제를 겨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식민지 조선과 해방 후 한국을 곧바로 연결해주는 글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저자는 해방 직후 조선에 있었던 일본인들의 모습을 조선인, 그리고 점령군(미군, 소련군) 등 사이의 관계를 통해 살펴보고 있다.
저자가 피력했듯이 이 책은 한일 양 민족의 '헤어짐'의 방식과 인간 군상의 모습을 일본인들의 회고를 통해 입체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했다(5쪽). 여기에는 해방 직후 일본인들의 다채로운 인간군상이 묘사되어 있다. 일본이 패망하고 천황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슬퍼하고 당황했던 일본인들, 일본이 패전할 것을 예측하고 재빠르게 재산과 가족을 미리 일본으로 옮겨간 사람들, '대일본제국'의 영광을 조선에서 구현하고 과시하고자 했던 조선총독부가 패전 직후 상황에 특별히 대처하지 못하고 조선에 있던 많은 일본인에게 불안과 분노를 샀던 사실, 자신의 고향은 조선이라는 믿음 속에서 잔류를 원했던 일본인들, 소련군에게 강제로 끌려간 38선 이북의 일본인 남자들과 남겨진 일본인 여성들과 아이들의 모습들이 그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모습에서 저자는 몇 가지 의미 있는 설명을 시도하고 있다. 우선 조선에 있었던 일본인들의 본토 귀환과 정착 과정을 통해 저자는 구 일본제국의 균열과 취약성, 일본 지배체제의 허상을 보여주고 있다. 패전 과정에서 일본으로 귀환했던 해외 일본인들은 본토인 입장에서는 모두가 자신의 삶을 더욱더 어렵게 만드는 민폐 집단으로 비춰졌다. 패전의 폐허 속에서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귀환 일본인들은 골칫거리로 존재했던 것이다. 또한 조선에 살고 있었던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의 삶에 무지했고, 관심이 없었다. 그 점은 일본제국의 지배체제가 갖고 있던 취약성이었다. 아무리 일본인과 조선인은 하나라는 '내선일체'를 강조해도 막상 일본인들의 무관심과 무지가 존재하는 이상, 그 구호에는 심각한 균열이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일본인들의 회고에서 드러나는 조선인들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은 일제시기 조선인과 일본인이 어떻게 한반도라는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었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총독부 관리의 딸로 조선에서 20여 년을 살았던 한 일본인 여성은 노년에 다시 한국 땅을 찾았다. 그가 살았던 지역인 현재의 충무로 일대는 그가 눈감고도 돌아다닐 수 있었던 만큼 여전히 익숙한 곳이었으나, 거기서 인사동과 종로 쪽으로 가자마자 그는 낯선 이방인이 되었다. 조선에서 20년을 살았지만 그의 행동반경은 그가 살던 집과 학교, 근처에 머물고 있었고, 조선인들이 살던 곳으로는 시선이 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조선인들에 대한 일본인들의 무지와 무관심을 다시금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것은 결국 일본 통치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한편 이 책은 해방 후에서 현재까지 한-일 양국의 문제에 가로놓여 있는 역사인식이라든가, 여러 문제들의 기원, 특성을 이해하고 파악하게 해주는 글이기도 하다. 패전 직후 일본 정부는 사회 곳곳에서 불거진 집단 간의 균열을 막고자, 모든 국민이 전쟁으로 피해를 입었다는 정치적 수사를 구사하며 광의의 '전쟁 피해자.희생자론'을 유포했다. 이는 국가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논리였다. 어쨌든 귀환 일본인이나 본토 일본인 등 자신들이 '패전의 피해자'라는 인식은 이후 동아시아 역사분쟁을 낳는 인식적인 기반이 되었다. 현재까지도 일본의 아시아 침략이라는 사실이 가려지고, 일본이 점령했고 통치했던 사람들의 피해상에 대해서는 등한시하는 문제가 발생했던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자신도 피해자'라는 인식에서 왜 너희만 피해자라고 강조하느냐는 인식의 구조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 책은 현재 한일관계의 문제와 그 배경에 대해서 여러 각도로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과거 일본에 피해를 입었던 우리만을 생각하고, 이후에 한국(사회)이 다른 사회, 다른 나라의 사람들의 삶에 미치고 있는 영향은 없는지를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현재 '다문화'라고 표방되고 있지만 그것이 과연 공존의 차원에서 한국사회가 '함께 살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인지, 그러한 문제들에게도 시선이 돌아가야 할 것이다.
가해와 피해의 시각을 넘어서서 진정한 공존과 평화를 지향하기 위해서, 끝으로 '세계인'으로서의 한 귀환 일본인을 소개하고자 한다. 7장 부분에서 저자는 조선의 노동운동가들과 함께 함흥 지역에서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에 투신하고, 해방 직후에는 고통을 겪고 있던 일본인 동포의 귀환에 힘을 썼고, 귀국한 후에도 지속적으로 그가 살았던 북한 사회가 발전하도록 애정을 갖고 기원했던 한 일본인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대다수의 일본인은 자신들이 입은 고난을 군국주의 일본의 무모한 전쟁 행위에 따른 결과로 간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조선 민족에 대한 일본의 반세기에 걸친 박해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일본인은 얼마나 반성했을까. 그저 자신들이 조우했던 고난에만 매몰되거나, 혹은 조선 민족을 가해자로 생각하고 이들을 미워하며 조선을 떠나지는 않았는지 ... "(264~265쪽)
민족과 국가의 틀을 벗어나서 진정하게 상대방을 인정하고 이해하려고 하는 그의 모습은 우리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