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루키의 기억에 사십 년간 자리 잡고 있다가 일흔한 살이 되어서야 다시 쓰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기사단장 죽이기>이후 육 년 만에 출간한 그의 장편소설이 반갑기도 하고, 이러한 소설의 탄생 배경도 호기심을 자극했다.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는 시계바늘이 없다. 시간의 축적 없이 현재만 존재한다.
본체는 불필요한 것, 해로운 것으로 치부당해 벽 바깥으로 추방되고 그림자만 남아서 살아간다.
그들이 마음에 품은 감정들은 '역병의 씨앗'이다. 이들은 감정을 남김없이 긁어내 밀폐용기에 담아 도서관 깊숙이 차곡차곡 넣어 둔다.
갇혀있는 영혼들은 진짜 감정을 가진 인간이 공감으로 어루만지고 달래주어야 역병으로 자라지 않는다.
나는 매일 도서관에 가서 그 감정들이 꿈이 되어 내 몸을 통과해 가는 것을 감각으로 느낀다.
내 역할은 그림자 마을의 유일한 '꿈 읽는 이'다.
황량하고 무료해 보이는 이 도시는 디스토피아를 보는 듯하다. 자본주의는 몰락하고, 모두가 가난해진 사회다. 사람들의 감정은 메말라 책도 음악도 없다. 인간미가 사라진 냉소적인 도시에 예술마저 없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하루키는 이 쓸쓸한 세계를 그림자들이 사는 마을로 그려냈다.
하루키의 소설에는 이처럼 초현실적인 세계가 종종 등장한다. 하지만 만화 영화같이 황당무계하거나 생뚱맞지는 않다. 어딘가에 존재할 것만 같은 그럴듯하고 구체적인 세계이다. <1Q84>의 '달이 두 개인 세계'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주인공은 현실과 초현실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스펙터클하게 이끌어간다. <태엽 감는 새> <기사단장 죽이기>에서도 같은 방식이 쓰였다. 하루키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그의 놀라운 상상력의 판타지를 경험하는 것이 아닐까.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벽‘>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높은 벽은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한다. 그는 이 벽을 살아 있는 생명체에 비유했다. 상대에 따라 견고함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의 제목처럼 ‘불확실한 벽’이다.
장자의 '호접지몽'이 연상된다. 나도 가끔 꿈이 현실과 너무 비슷해서,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하루키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을 인용했다. 마르케스가 <백 년 동안의 고독>에서 보여주는 ‘마술적 리얼리즘’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루키는 그가 등가적으로 이웃하는 현실과 비현실을 꾸밈없이 기록했을 뿐이라고 표현했다.
소설에서 현실은 하나가 아니다. 여러 가지 중에서 내가 선택한 것이고, 몇 가지 현실이 섞이기도 한다. 현실과 비현실이 구분이 안되는 상태에서 현실 또한 여러 갈래라면 나의 또 다른 분신이 존재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비현실일 수도있고, 주인공 ‘나’처럼 현실의 내가 본체가 아닐 수도 있다. 평행이론 같기도 하고, <인셉션> <매트릭스> <인터스텔라> 같은 영화도 생각난다.
<본체와 그림자>
소설에서 본체는 의식과 감정이 있고, 통증을 느낀다. 그림자는 본체와 분리되며, 생명력과 주체성이 없는 차갑고 무의미한 존재로 그려진다. 반복되는 삶에 바쁘고 고독한 현대인들이 그림자같이 느껴졌다.
하루키는 의식과 기억이 시간에 역행할 수 있고, 두 세계를 초월해 넘나들며, 타인과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표현했다. 반면, 죽음 이후에도 의식이 살아있어 나와 교감하는 고야스 씨, 나와 의식의 합일을 하는 옐로 서브머린 소년을 보면 육체는 전혀 의미가 없어 보인다.
일흔이 갓 넘은 그에게 육체는 이제 짐이 되어버린 것일까? ‘육체 따위, 그저 너저분한 폐기' '궁상맞은 용기' 등의 표현 이면에는 육체라는 껍데기에서 당장이라도 빠져나오고 싶은 욕망마저 느껴진다.
의식과 구별되는 마음도 있다. 내가 제어하지 못하는 마음은 ‘뛰노는 어린 토끼' '자유롭게 나는 새'에 비유했다. 마음과 의식은 이드와 자아, 본능과 이성의 관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역병의 씨앗’이라 표현함 감정도 마음의 매 한가지이다. 슬픔, 망설임, 질투, 두려움, 고뇌, 절망, 의심, 미움, 곤혹, 회의, 자기연민...그리고 사랑. 내 뜻대로 되지 않아 제거하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아이러니하게도 그림자만 남게 된다. 감정은 풍요롭고 다채로운 삶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사랑>
하루키 소설에서 로맨스는 평범하지 않다. <상실의 시대>에서는 거칠고 적나라하며 난해하기까지 하다. 이번 소설에서는 푸릇푸릇한 첫사랑을 다루고 있지만, 갑자기 사라진 소녀는 어딘가 미스터리하기만 하다.
성을 숨김없이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도 여전하다. 성에 대해 보수적인 한국인에게는 하루키의 표현에 거부감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성에 대한 그의 개방적이고 솔직한 태도가 속 시원하다. 하루키의 팬들은 아마 이번 소설을 읽고 그가 많이 유순해졌다고 느낄 것이다.
주인공 ‘나’가 커피숍 여주인과 중년의 로맨스를 시작하면서 느낀 마음이 재미있다. '무언가를 불태울 것처럼 강렬한 감정'에서 '지혜와 경험으로 억제된 감정'으로 변한 것이다. 불꽃이 사그라든 어른의 사랑이 안타깝지만 현실적이라 공감된다.
중년의 사랑은 온화하고 부드럽다. 포근하고 평온하다. 도파민보다는 세로토닌의 사랑, 에로틱보다는 플라토닉한 사랑에 가깝다. 육체적 감각보다 정신적 교감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오래된 연인이나 부부가 정으로 산다고 하는 말과 통한다.
좀 더 넓은 범위에 이르는 사랑은 이성을 초월한 우정이기도 하다. '상대에게 나 자신을 고스란히 내주고 싶다는 종합적 충동'이 하루키가 말하는 ‘사랑’이라면 옐로 서브마린 소년, 고야스 관장과의 관계도 넓은 범위의 사랑이다.
주인공의 해바라기 같은 사랑이 특별하고 순수하게 느껴지는 세상이다. 그의 말대로 사회가 ‘날로 편리하고 비로맨틱한 장소’가 되어가는 것이 나는 안타깝게 느껴진다. 경제적 이유로 연애나 결혼을 포기하는 청년들은 ‘그림자’나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연애란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정신질환’이더라도 우리에게 로맨스는 필요하다. 콩깍지가 씌이고, 후광효과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지라도 나는 로맨스가 삶의 가장 큰 즐거움이라 생각한다.
하루키 소설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사랑과 음악은 그의 판타지와 더불어 감성을 콕콕 자극한다. 예술과 문학을 즐기고, 독서와 글쓰기를 꾸준히 하는 그의 삶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번 소설은 본체와 그림자,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가 새롭고 흥미로웠다. 감정, 마음, 의식 모두가 균형있고 충만하게 살아간다면, 지금의 현실이 언제나 가장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