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책소개] 질서의 소멸
- 일곱 가지 키워드로 보는 국제질서의 대전환
이춘근 (지은이), 보다나은, 2026-03-27
최근에 읽은 조한범 선생의 《무극화시대》와 같은 출판사에서 발행한 책이다. 저자인 이춘근 박사의 책을 읽다 보니 “원교근공 (遠交近攻, 먼 나라와는 친교를 맺고 가까운 나라는 공격하라)”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역사적으로 중국이 위치한 대륙의 패권국들이 외교·대외 전략으로 활용해 온 것으로 알려진 이 개념은, 오늘날에도 정치 연합과 협력의 변동성, 이익집단의 선택 등을 이해하는 데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런 점에서 나는 중국을 안보·경제·역사 인식 등의 측면에서 장래의 위협 요소로 보고 있어, 더욱 관심을 가지고 읽었다.
친중이냐, 친미냐, 친북이냐, 친일이냐, 친러냐… 20세기 초 식민지 상황을 경험한 우리나라가 2020년대에도 여전히 이 논쟁에 머문다면, 역사에서 배운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인접한 이북·중국·대만·일본·러시아, 그리고 바다 건너 미국까지, 핵을 보유했거나 군사·경제·기술력이 만만치 않은 상대국들이다.
북·미·중·러 모두가 흔들리는 이 시기에, 대한민국 역시 새로운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이 던지는 문제의식은 가볍지 않다. 결국 중요한 것은 선택의 구호가 아니라 생존의 전략 아닐까. “원교근공(遠交近攻)”이라는 말이 지금도 유효하게 들리는 이유다. 영화 <곡성>의 대사처럼 ‘뭐시 중한디(뭣이 중헌디)’,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볼 시기라는 생각이 든다.
[지은이] 이춘근
국제정치·국제안보 분야를 연구해 온 학자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텍사스대학교 오스틴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세종연구소 등에서 외교, 안보 문제를 연구했으며, 국내외 여러 대학에서 국제정치학을 강의했다. 미중 관계, 한미동맹, 한반도 안보 문제를 중심으로 연구와 저술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또한 40만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브 채널 ‘이춘근 TV’를 통해 가장 가까운 곳에서 독자들을 위한 언어로 국제 정세와 안보 이슈를 해설하며 끊임없이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표지 앞날개)
[주의 깊게 읽어 볼 만한 구절들]
○ 트럼프는 친중, 반미, 독재, 이슬람, 좌파 국가들을 계속해 손보고 있다. 그의 최종 목표는 중국을 미국의 지위에 도전할 수 없는 나라로 추락시키는 것이다. 트럼프는 이를 위해 '전광석화'의 속도로 과감한 외교 정책과 군사 정책을 단행하고 있다. 트럼프의 전략은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를 막을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이렇게 우리에게 익숙했던 질서를 바꾸는 것을 넘어 소멸시키고 있다. 물론 현 질서를 소멸시키는 동시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질서의 소멸, 그리고 트럼프가 바라는 새로운 국제질서의 도래, 미국에 의한 평화(Pax Americana)의 시대가 점점 우리 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에필로그 중에서 ㅡ뒤표지)
○ 트럼프의 정책을 '예측 불가능한 광인의 춤'으로 치부하는 것은 그의 전략적 의도를 간과하는 피상적인 분석에 머무를 위험이 크다. 그의 스타일은 분명 파격적이고 이질적이지만, 그가 내리는 결정의 저변에는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고 경쟁자를 제압하려는 지극히 전통적이고 현실주의적인 계산이 깔려 있다.
그는 반칙을 쓰는 이단아가 아니라, 레이건 시대의 성공 방정식을 21세기 중국이라는 새로운 상대에게 적용하려는 가장 충실한 계승자에 가깝다. 이러한 본질을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의 행동 이면에 숨겨진 일관된 전략과 목표를 읽어낼 수 있다. (p.24~26)
○ 트럼프의 외교는 모든 적을 동시에 상대하는 어리석음을 피하고, 가장 강력한 적을 먼저 고립시킨 후 나머지 위협 국가들을 순차적으로 관리하는 정교한 전략에 기반한다. 그의 정책은 동맹국과 마찰을 일으키고 국제 규범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모든 행동의 저변에는 '주적 중국의 고립'과 '반미 연대의 와해'라는 일관된 목표가 자리 잡고 있다. 결국 그의 외교 정책은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적대 세력의 결속을 막고 내부 균열을 유지하는, 가장 현실적이고 전통적인 강대국 외교의 원칙을 충실히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p.70~71)
○ 트럼프의 정책은 일종의 ‘강제된 변혁’이라 할 수 있다. 관세 전쟁을 통해 상대국의 경제 구조를 뒤흔들고, 첨단 기술 수출을 통제하여 미래 성장 동력을 차단하며, 강력한 군사적 우위를 과시하여 지정학적 야심을 꺾는 일련의 조치들은 모두 이 거대한 목표를 위한 수단이다.
이는 마치 외과의사가 환부를 도려내듯, 위협의 근원을 제거하려는 시도와 같다. 나쁜 행동의 원인이 되는 체제와 그 지도부를 직접 겨냥하여, 그들이 기존의 방식을 고수할 경우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을 치르게 함으로써 근본적인 노선 변경을 강요하는 것이다.
이처럼 트럼프의 외교는 봉쇄라는 방패를 넘어, ‘본질적 변화’라는 날카로운 창을 휘두르는, 21세기 미국의 완전 패권을 추구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p.83)
○ 중국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근본적인 명제는 ‘중국은 국가가 아니라 문명(China is a civilization, not a nation)’이라는 통찰에서 시작된다. 이 말은 호주 출신의 저명한 중국 전문가 로스 테릴(Ross Terrill)이 그의 저서에서 제시한 개념으로, 현대 중국이 겪는 수많은 내부적 딜레마와 외부 세계와의 갈등을 이해하는 핵심 열쇠를 제공한다.
그는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정립된 서구의 ‘국민국가’ 개념으로 중국을 재단하려는 시도는, 거대한 코끼리를 손으로 더듬어 각기 다른 부위만을 묘사하는 것과 같은 오류를 낳는다고 말했다. 중국 공산당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 역시 바로 이 ‘문명’이라는 거대한 실체를 국가라는 현대적 그릇에 억지로 담아 통치하려 하는 데서 비롯된다. (p.115)
○ 만약 중국이 지속 가능한 경제 성장을 위해 진정한 시장경제와 법치주의를 도입하는 개혁을 단행한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시진핑 중심의 공산당 1당 독재 체제의 근간을 흔들게 된다. 경제적 자유의 확대는 정치적 자유에 대한 요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투명한 정보 공개, 공정한 경쟁, 사유 재산의 완전한 보장은 공산당의 자의적인 권력 행사를 제약한다.
더 나아가 정치 체제가 민주화될 경우, 티베트와 신장 위구르 지역의 독립 요구를 무력으로 억압하거나 대만을 군사적으로 위협하는 현재의 강압적 통치는 정당성을 잃게 된다. 최악의 경우, 구소련처럼 국가가 분열되는 시나리오까지 맞이할 수 있다. 공산당 지도부에게 개혁은 곧 권력의 상실이자 국가 통제력의 와해를 의미하는, 받아들일 수 없는 선택지인 것이다. (p.170~171)
○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우리의 과제는 '인식의 전환'이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특히 미국의 대전략이 어떤 목표를 향해 움직이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우리의 '적'들이 어떻게 약화되고 있는지를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트럼프의 정책을 예측 불가능한 광인의 춤으로 치부하거나, 미중 갈등을 강대국 사이의 힘겨루기로만 바라보는 피상적인 시각을 버려야 한다.
그 이면에는 '유럽과 아시아 대륙에서의 패권 국가 등장 저지'와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 재편'이라는 일관된 목표가 있으며, 중국, 러시아, 이란, 북한은 이 거대한 계획에 따라 순차적으로 약화되고 있는 체계적 관리의 대상임을 직시해야 한다. 이러한 거시적 안목을 가질 때 비로소 우리는 개별 사건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거대한 흐름 속에서 우리의 전략적 좌표를 설정할 수 있다. (p.333~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