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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숭e의 독서노트
  • 한 스푼의 시간
  • 구병모
  • 10,800원 (10%600)
  • 2016-09-05
  • : 6,810

우주의 나이가 137억 년을 조금 넘나 그렇다지. 그 우주 안의 콩알만 한 지구도 태어난 지 45억 년이나 되고. 그에 비하면 사람의 인생은 고작 푸른 세제 한 스푼이 물에 녹는 시간에 불과하단다. 그러니 자신이 이 세상에 어떻게 스며들 것인지를 신중하게 결정하고 나면 이미 녹아 없어져 있지. (p.184)

 

문장이 아름답다. 눈에 박히는(?) 문장이 자주 보인다. 특히나 작가가 말을, 단어를 조각내어 다루는 능력에 참 많이 놀랐다. 마치 내가 은결인 것처럼, 누군가의 대사를 읽고 곱씹고 따라했다. 이미 알고 있는 말들임에도 단어와 문장이 종종 낯설게 느껴졌다.

 

은결이 주변 사람들과 영향을 주고 받으며 성장하는 과정이 흥미롭다. 그리고 미세하게 변화하는 로봇의 심리라. "기술적으로 때가 늦었어도 상관없고, 사람에게는 영원히 반복되어도 무방한 테마란 게 있는 법이며, 하드SF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면 꼭 정확하고 합당한 논리와 풍부한 사실관계에 입각하지 않아도 되리라는 자기합리화"(작가의 말)를 거쳐온 작가였어도 분명,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본 적 없는 것에 대한 상상이 오히려 쉽지 않을까. 가상의 것을 현실 세계에 들여온 이 작품의 경우, 그것도 너무나 처철한 지금의 현실을 맞닥뜨린 가상의 존재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를 꾸려나가기란 쉽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럼에도 이야기를 자연스레 마무리 지은 작가의 능력에 감탄했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이 책이 출간된 것을 보고, 읽고 싶은 책으로 소개하면서 내가 썼던 말이, "책소개를 보고 나니 뭔가 냄새가 난다. 그리고 걱정이 된다. 혹시 내가 예상하는 그 이야기를 읽게 될까 겁이 난다." 고 했었다. 또 '작가의 한마디'를 읽고는, "작가 스스로 소재의 진부함을 깊이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고민을 거친 작품일거라 짐작하게 된다. 믿게 되고, 확인하고 싶어진다. 적어도 '마르고 닳도록 반복되는' 그런 이야기는 아니지 않을까 하는, 설렘이랄까." 라고도 했다.

 

기대감으로 시작했던 이 확인 작업은, 책의 중반을 향해 가면서 '설마' 였고,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는 '역시나' 였다. 고민의 분량과는 별개로, 그 결과물은 (조심스럽게) 안타깝다. 걱정은 현실이 되었고, 겁 먹었던만큼 당황스러웠다. 결국 '마르고 닳도록 반복되어 온' 이야기를 슬쩍 보탠 느낌이다. 

표지의 "내내 설레고 아름답다가 끝내 먹먹해진다."는 문구를 난 이렇게 쓰고 싶다.

"내내 뻔하고 안타깝다가 끝내 답답해진다."

또 작품 안의 구절을 빌리자면,

"기승전결이 명확하고 훈훈한 콩트. 참신하지 않으나 보편적으로 선호되는 패턴을 지닌 동화."(p.88)

​와닿는 표현이다.

 

이 소설은 뭘 말하고 싶은 걸까. 이 책을 읽으면서 답답해질 때마다 떠오르는 생각. 이 생각으로 책을 여러 번 덮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진부한 소재를 상투적인 방식으로 이끈다. 몰입을 어렵게 만든다. 음료없이 식빵을 잔뜩 삼킨 기분이 든다. 또 세탁소와 연결된 인물들의 삶은 과격하게 우울하다. 극적으로 슬픈 상황들을 자꾸 찾아 배치한다. 우리 현실의 단편이라지만, 이런 우울마저 진부하게 느껴진다. 우울이 매력을 배가시키는 소설이 있는 반면, 이 소설은 우울이 식상함을 채운다.

 

이다지도 처참한 느낌이 드는 이유가 뭔지를 고민했다. 이 책을 읽은 다른 이의 감상을 훔쳐보면서 내가 빠뜨린 게 있었는지를 다시 돌아봤다. 내 성미가 이상한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 감동하고 따뜻함을 느꼈다. 아마도 나는 이 작가의 고민이 어떻게 드러나는지가 궁금했었나보다. 뻔한 이야기를 뻔하지 않게 갈무리할 거라는 기대감(욕심에 가까운)으로 이 책을 대했기 때문인가보다. 우리의 삶이 이렇게 진부하고 우울하지만 그 속에 따뜻함이나 애틋함이 있어서 우리는 살아갈 만하다는, 또다시 진부한 결말을 보며 김이 샜는지도 모르겠다. 뻔해서 느끼는 어색함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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