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는 포르노, 제2회는 불륜, 제3회는 도박.
우연이겠지만 말하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이 입방아를 찧어대는 세계문학상 수상 작품들의 키워드들이다. 제3회 수상작인 <슬롯>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 이야기는 도박과 여자에 관한 것이다.’
쿨하게 던져 놓은 화두 뒤로 헤어진 여자 친구를 등장시켜 잭슨 폴록의 마초키드를 열망하는 주인공을 마치 운명처럼 카지노로 이끈다. 주인공은 화려하게 돌아가는 슬롯머신을 앞에 두고 도박과 일상의 확률에 대해 말한다.
동전을 던졌을 때 앞면과 뒷면이 나올 확률은 50 대 50. 주사위는 6분의 1. 로또 일등 담천 확률은 814만 5,060분의 1. 그렇다면 달아난 고양이가 집으로 돌아올 확률은 얼마일까? 날 뻥 차버린 옛 애인이 찾아와 함께 10억을 써버리자고 속삭일 확률은?
처음만 보고 물기 많은 내용을 기대했다면 다소 실망스런 전개일지도 모른다. 카지노의 화려함, 평소에는 꿈도 꿔 볼 수 없는 거액이 장난감처럼 생긴 칩에 의해 간단하게 오고가는 대범함, 화려한 치장을 한 아름다운 여인들의 하이 톤의 웃음소리와 평소에는 입에 대볼 수도 없이 비싼 양주와 최고급 시가. 일탈과 방종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벌어지는 떠들썩한 축제.
결론부터 말하면, <슬롯>에 그런 내용은 없다. 여유 따위 없이 피곤에 지친 채 열심히 노동하고 있는 ‘도박 중독자’들이 있을 뿐이다. 주인공은 그런 인간 군상에 대해 어떤 비난도, 충고도 하지 않고 묵묵히 바라본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그것이 연인 관계라고 할지라도 ‘경계란 누구에게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슬롯>의 작가 신경진은 신인이다. 지금까지 한번의 스포트라이트도 받지 않은 신인이 국내에서 고료가 가장 큰 문학상인 세계문학상에 덜컥 당선된 것은 어찌 보면 현대판 신데렐라의 탄생처럼 보였다. (마침 작가도 신씨이고 ^^)
하지만 <슬롯>을 읽어본 후 신데렐라 운운하는 것이 호사가의 공허한 말임을 알 수 있다. 짧지 않은 이야기를 끝까지 샛길로 빠지지 않게 집중력을 유지하면서 뚝심 있게 끌고 가는 힘은 신인에게서 보기 드문 저력이다. 형이하학의 통속적인 주제로 형이상학의 사유의 세계를 매끈하게 풀어내는 솜씨 또한 무리 없이 세련되다. 도박과 여자라는 자극적인 주제로, 삶의 불확정성과 부조리함, 사회의 모순에 대한 의문, 불확정 시대를 살아가는 우유부단한 개인들의 소통의 단절에 대해 말하면서 이 신인 작가만큼 담담하게 관조하는 자세를 유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작가는 1년 동안 정선 카지노를 수시로 방문했다고 하니 작가의 개인적인 기록을 반영한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슬롯>의 주인공의 어눌한 독백은 작가 자신의 중얼거리는 듯한 고백과 거의 일치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카지노 안에서 만나게 되는 인간 군상에게 섣불리 관여하지 않고 그저 바라볼 뿐이다. 카지노를 나가면 언제나 이기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도 슬롯머신 앞에 늘어선 군중을 바라보며 비웃을 수 있는 여유가 없는 것이 씁쓸하지만 우리의 현실이니까.
카지노와 도박이 특이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이 상황이 계속된다면 또다시 일상이지 못할 것도 없다. 일상 역시 도박과 마찬가지로 무작위와 우연에 기대어 이루어지는 별도 이벤트들의 연속일 뿐이어서. 확률과 우연의 연속적인 이벤트에 정신없이 휘둘리는 것은 카지노나 인생이나 다를 것이 없다.
그렇다면 사랑. 사랑도 어쩌면 확률일지도 모른다고 주인공은 소심하게 말한다. 그렇지만 아무리 관찰하고 정보를 수집해서 분석해도 예측대로 되는 법이 없다. 함께 여행을 온 수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길도 없다. 헤어진 여자 친구에게 미련을 갖는 것처럼 병신 같은 일은 없다고 누구나 생각하겠지만 다음 카드가 보고 싶은 호기심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삶은 원래 그로테스크하다는 식의 변명은 하고 싶지 않지만,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확인하고 싶은 욕망을 거스를 수는 없다. 어차피 삶뿐만이 아니라 자연계의 모든 것은 예측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지치지도 않고 사랑을 하고 도박을 한다.
요즘엔 청자보다는 화자가 절대적으로 많다. 오직 내 생각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고 나를 내보이고 싶어 하는 요즘 사람들의 관심 화두는 오로지 ‘나’이기 때문에 함께 대화를 해도 주제는 서로 다투듯 쏟아내는 ‘나’에 대한 것밖에 없다. 결국 소통의 단절이 문제가 아니라, 소통을 하되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자신만의 언어로 말하기 때문에 대화는 독백이나 다름없고, 어느 누구도 상대방을 이해하거나 상대방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것이다. 소통을 해도 무의미한 소통이다. 하지만 포기할 수도 없다. 상대방이 나와 다른 것은 인정해야겠지만 나의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다른 도리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