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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님의 서재
  • 우리는 모두 이불에서 태어난걸요
  • 봉주연
  • 10,800원 (10%600)
  • 2025-08-31
  • : 2,214
꽤 안 읽히는 시집이 오랜만인데...

시 들이 전하려고 한 말이 많아서인지
날이 무더워서 인지 모르겠다.

- 거기에 돌부리가 있다는 말을 다섯 번쯤 듣고도
같은 곳에 걸려 넘어졌다.
그러자 당신은 내가 넘어질 곳에 습기 머금은 흙을 덮어주기 시작했다. - 시인의 말

- 나선계단을 오르면 어느 날에는 레코드 가게가 되었다가 어느 날엔 거실이 되고, 어느 날엔 헌책방이 됩니다. 사고 싶은 책을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꽂아 넣고 다음 날 다시 찾으러 오는 마음. 그러고도 사지 못하고 다시 더 깊은 구석에 꽂아 넣는 것. 그림자는 내 옆으로도, 앞으로도 생겨날 수 있는데 항상 뒤로 생겨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곡해하며 자라났습니다. - 계단참 중

- 벌써 벚꽃이 피었다니, 감탄하는 3월의 사람들. 얼굴을 모른 채 목소리만 들을 수 있다면 사람을 깊이 사랑할 수 있겠다. - 식물 식별 능력 중

- 전등이 떨린다. 식탁에 모여 앉은 어제와 내일과 당신. 대화를 나누는 너희 사이에서 잠자코 있는 것만으로 나는 거짓을 쌓아가는 거예요. 둥그런 식사는 너의 배려와 무심함의 형상이었다. 우리가 그저 서로의 평범한 저녁이었더라면, 시간이 흐르더라도, 이렇게 변했구나, 손등을 쓸어내리는 손끝을 피하지 않으면서, 도리어 손을 잡아끌어 거머쥐었더라면. - 내밀의 빛 중

- 우리는 모두 이불에서 태어난걸요. 천에서, 유연함 속에서.
(...)
타향이 고향이 되는 거야. 어지럽게 짐이 펼쳐진 거실 마루에 앉았다. 반나절 만에 다른 곳으로 왔구나. 달라지기보다 달라지기를 결심하는 시간이 길고. 본가가 어디냐고 물으면 태어난 곳을 말해야 할지, 자라온 곳을 말해야 할지, 부모님이 계신 곳을 말해야 할 지 고민했다. - 주소력 중

- 결말을 걱정하진 않습니다. 잘 되든 못되든 모두 별일이 아닙니다. - 해로운 장난 중

- 그 한낮, 창고에서 불탄 사람은 서른여덟 명이다. 그 숫자를 확인하기까지 물류 창고 현장에 나간 기자와 취재부 사이에 수많은 통화가 오갔고, 취재부와 편집부 사이에 수많은 뜀박질이 있었다. 사망자의 숫자가 표시되는 전광판 앞에서 그는 차오르는 숫자를 실시간으로 보고했다. 서른입니다, 서른하납니다, 서른셋입니다, 넷입니다, 다섯, 여섯, 일곱입니다. 사회부장과 했을 가장 마지막 통화에서 그는 "서른여덟인 것 같습니다"라고 얘기했다. '서른여덟입니다'가 아니라 '여덟인 것 같습니다'라는 불확실한 단정. 수회기 너머로 보고를 들은 사회부장은 불길이 화를 냈다. 그런 말끝 처리가 촌각을 다투는 마감 시간에는 아무 쓸모 없는 예의차림이어서였을까. 1면 톱기사 제목에 실릴 사망자 숫자가 틀려선 안 되기 때문이었을까. 확실한 건, 서른여덟 명이나 죽었단 사실에, 그 밤 사무실에 앉아 있던 우리는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한낮, 불탄 창고에 죽은 사람이 몇 명인지 속보를 날랐던 그는 "너무 공감하면 안 돼"라는 말을 했다. 서른여덟 번의 죽음에 한결같이 슬퍼한다면 속보를 쓸 수 없을 테니. 그렇지만 가끔 생각한다. 서른여섯번 째 사람과 서른여덟번째 사람의 죽음, 그 사이에 숫자가 무슨 상관일까. 오탈자가 무슨 잘못일까. 오히려 서른여덟이란 결말로 가는 한 단계로써 그 근처의 숫자들엔 개연성이 생겨난다. 서른여덟이란 결말에 다다르기 직전까지 한 번이라도 그 비극에 망설여본 사람이라면 '사망자가 모두 서른여덟인 것 같습니다'라고 말끝을 흐릴 것이다. 서른여섯이든 여덟이든 모두 비극이지만 그래도 조금 덜 슬픈 결말에 발이 묶일 것이다. - [1보] [9보] [12보] 중

- 아름다움의 곁을 지나면 모든 것과 멀어졌다. 정강이 높이만큼 솟은 등불들이 지키는 길은 그래서 어떤 계절에도 슬프지 않은 때가 없었다. - 여우의 귓바퀴 중

- 생활의 70퍼센트는 대기하고 참는 일이야.
정박으로 떨어지는 노래를 느리게 허밍하다가
왼발에 맞춰 구령을 넣는 거야. - 인터로킹 중

- 나는 당신의 어린 모습이 닳는 게 아까워서
아무것도 짐작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 모과 중

- 수평선에서 파도가 생기는 순간을 지켜보기.
사람도 이렇게 사랑한 적이 없었다.
(...)
우리는 끊임없이 각자의 마음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 해발 중

- 우연은 경이로움으로 오역되곤 한다. - 대체 가능한 사람 중

- 눈을 감고 걸어 다닌 길은
눈을 감아야지만 찾아갈 수 있다. - 윤곽 중

- 어느 날 당신이 나를 다급하게 불렀다.
안방으로 들어가니 당신은 내 손목을 잡아 바닥에 눕혀
이불을 목까지 덮어주고 꾹꾹 빈틈없이 눌렀다.
"달라진 거 없어요?"
"잘 모르겠어요."
"새 이불이에요, 햇볕에 종일 말렸어요."
그러고 보니 정말 이불을 들썩일 때마다 얼굴 위로 햇볕을 머금은 냄새가 났다. 맨다리에 닿는 감촉도 습기 없이 빳빳했다.
그해 당신은 나에게 새봄의 첫 이불을, 그 고실고실한 햇볕을 선사한 것이다. - 뒷 표지 문구

2026. jul.

#우리는모두이불에서태어난걸요 #봉주연 #문학과지성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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