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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나니아님의 서재
  • 단지, 우리가 잠시 머무는 곳
  • 왕민철
  • 15,750원 (10%↓870)
  • 2026-10-16
  • : 910

다큐멘터리 감독의 시선을 따라 세상을 보면

가장 진실된 사실이 보이겠지만,

동시에 그의 시선에 담긴 의도대로 세상을 보게 된다.

 

그래서 무엇을 더 미워하게 되거나

누군가를 더 사랑하게 될까봐 두려워진다.

나에게 다큐멘터리의 매력은 그런 것이었다.

동시에 다큐멘터리의 불편함도 같은 데 있었다.

감독의 시선, 감독의 의도, 감독의 가치관과 신념이

곧 나의 마음이 된다는 부담감.

 

왕민철 감독의 글은 그런 부담감을 떠넘기지 않는 신기한 글이다.

내가 처음 ‘생츄어리’를 알게 되었을 때 느꼈던

판단할 수 없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슬프지만은 않은 기분과 비슷했다.

 

동물을 안타깝게, 불쌍히 여기거나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은

인간이기에 언제든 가질 수 있다.

동시에 인간이기에 언제든 그 마음을 차순위로 미루고 미루다

‘중요한 것’에서 제외할 수도 있다.

 

나는 <단지, 우리가 잠시 머무는 곳>을 읽으면서

내 인생에서 함께하고, 고민하고, 살아가고, 고민했던

동물의 역사를 떠올려 볼 수 있었다.

 

*

 

나에게는 계절마다 다른 곤충이 튀어나오는 시골에서 자랐던 어린 시절이 있다. 산동네에서는 계절이 바뀌는 것을 ‘소리’로 알 수 있었다. 밤에 우는 동물 소리가 달라지고, 아침에 지저귀는 새소리가 달라지고, 풀벌레 소리가 바뀌고, 바람 소리, 풀과 나무의 소리가 달라진다. 계절마다 새로 나타나는 곤충을 잡으며 놀다 보면 어느새 아이들은 나비나 잠자리 같은 곤충은 손으로 잡지 않게 된다. 손가락 땀에 젖은 곤충의 날개는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학교 가는 길에는 도롱뇽을 발견할 수 있었다. 뱀허물을 발견하기도 했다. 완전 탈피한 뱀허물을 나뭇가지로 들어 길 한가운데 놓고 다음 친구가 놀라는 것을 보는 재미로 지각을 하기도 했다. 다리를 다치거나 날개를 다친 새를 발견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둥지에서 떨어졌는지 어미가 떨어뜨렸는지 알 수 없는 작은 아기새를 주운 적은 꽤 있었다. 근처 나무 둥치에 옮겨놓고, 어미새가 오는지 안 오는지 지켜보다가 아카시아 나무 냄새를 맡았다. 어미새가 오면 소리를 지르지 않으려고 친구들과 서로의 입을 막았다.

아버지는 동물 다큐멘터리나 우주 다큐멘터리를 보다 잠들었다. 자기도 재미없어서 보다 잠들 거면서 왜 항상 다큐멘터리 채널을 틀어놓는 거지…… 어린 마음에 투정부리듯 생각하다가도 어느새 빠져들어 화면을 넋 놓고 보고 있었다. 거대한 동물부터 미세한 포자의 세계까지 자연은 늘 경이로웠다. 새로운 동물 이름을 알게 되거나 귀여운 동물을 발견하면 꼭 이름을 외워두려고 했는데,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그 이름은 전부 꿈속으로 날아가버리고 없었다.

우리 집엔 늘 강아지나 고양이가 있었는데(심지어는 오리가 와있던 적도 있다), 반려동물보다는 보호소의 입소한 외국인 병사 같은 느낌의 동물들이었다. 누군가가 못 키울 사정이 있다며 맡기거나 길에 버려졌던 것을 구하거나 길에서 사는 어미 동물이 버린 꼴찌를 데려오거나 하는 식이었다. 이름을 지어주고, 좋아하는 사료나 과일을 먹이고, 수명대로 살다 갈 때까지 곁에 있었을 뿐. 그래서 반려동물이나 애완동물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에서 볼 수 있는 귀여운 강아지, 고양이, 햄스터와는 달랐다. 우리 집에서 살다 간 동물들은 옷은 없었지만, 털이 예쁘고, 발톱이 단정한 친구들이었다.

어머니는 어릴 때 소가 흘리는 눈물을 보고, 고기를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 70을 앞두고 있는 어머니가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육류(?)는 달걀이다. 나는 그런 어머니 손에 자랐기 때문에 ‘비건’의 개념이 낯설지 않았고, 내게 익숙한 음식은 ‘비건 음식’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성인이 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비건’이나 ‘동물 보호’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되었을 땐 내가 모르는 인간의 이면을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물론... 반대로 동물 복지나 비건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무서운지도 알게 되었다.) 서로에게 기이한 세상이었다.

나는 양계장의 닭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안다. 병아리가 얼마나 귀여운지, 성체가 되기 전 닭의 청소년기가 얼마나 우스운지도 안다. 축산 및 도축의 방식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템플 그랜딘의 운동과 그의 책 읽기를 좋아한다.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고 있다. 펫로스 이후 10년 만에 키우는 강아지다. 여전히 육식을 하고, 몇 년에 한 번 동물원이나 아쿠아리움에 가기도 한다. 동물원이나 아쿠아리움에 다녀온 날은 죄책감 때문에 잠을 뒤척인다.

강에서 물고기를 잡는 곰, 나뭇가지를 줍는 비버, 초원을 달리는 말, 정원의 물그릇에 모여든 새, 빙하 위의 북극곰 같은 동물을 떠올린다. 인간이 관찰할 수 있는 거리에 있으나 서로에게 관여하지 않는 거리에 사는 동물. 나에게는 그것이 동물과 함께 사는 삶 같고, 자연 같다. 타고난 모습대로 자연에서 자연스럽게 사는 生. 동물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관여하지 않으려 하지만, 인간은 이미 너무 많이 그들의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래서 그들도 우리의 삶에 끼어들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어디까지 끼어들어 동물을 돕고, 도움을 받아야 하는 걸까.

우리 삶으로 연장되는 생각들을 잘 정돈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내 삶도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동물들의 생활도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살아있는 것들이 덜 상처 받고, 조금 더 편안히 살 수 있기를 비는 것뿐이지만.

 

동물원 안팎에서 왕민철 감독이 발견한 장면들은 ‘삶’ 그 자체다.

삶을 영위하고 있는 존재 또한 인간과 동물과 동물의 삶과 분리될 수 없는 이들과 카메라 바깥의 자신과 아버지와…… 모두를 포함한다.

부담스럽고 막연한 ‘공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타자의 삶을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저자의 글솜씨는 어마어마하다.

다큐멘터리와 별개로 이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책을 읽으며 오랫동안 머물렀던 2부 <동물원의 안>의 일부 내용과

메모를 옮겨 적으며 리뷰를 마친다.

 

*

 

“우리는 반순이의 죽음을 추모해야 하는 시대에 살게 됐습니다. 반순이는 그 시대까지 버텨 살아냈습니다. 이 추모는 이미 죽은 반순이에게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살아남은 우리에게만 의미를 갖는 독백입니다. 지금 이 곰은 죽지만 수백 마리의 동물들이 반순이의 이십 년과 같은 삶을 이 공간에서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죽기 전에 더 살 만한 이 삶을 살고, 더 아프기 전에 죽을 수 있는, 반순이가 누린 이 행운이 단지 시민단체의 사육곰 구조와 환경부가 던져준 일 억이 안겨준 행운이어서는 안 됩니다. 반순이는 의도치 않게 갇혀 있는 삶과 싸워왔습니다. 우리는 그 싸움을 함께하겠다고 마음먹을 수 있습니다. 반순이에게 여전히 남은 미안한 마음을 전합니다.”

-최태규 수의사의 반순이 추도사 中

 

“애초에 농장으로 오게 된 너의 어미는 어쩌면 새끼를 놓고 혼자 도망가지 못했을 수도 있고, 너의 아비는 알량한 한 줌 먹이에 자유를 빼앗겼는지도 모른다. 잠시 코로나로 갇혀 있던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이제야 조금은 너희들을 이해했을지 모른다. 그동안 동물원의 좁은 시멘트 바닥에서 무료한 삶을 살게 해서 미안했다. 그래도 마지막은 발바닥이 조금은 덜 아린 흙바닥을 걷고 네가 만든 잠자리에서 고단한 하루를 위로했길 바란다. 잘 가라 반순아.”

-김정호 수의사의 반순이 추도사

 

“동물원에서 다루는 공식적인 서류에는 개체의 이름이 적히는 곳이 어디에도 없다. 종의 이름과 숫자가 적힐 뿐이다. 물범 두 마리가 죽고 두 마리가 새로 들어와 이름을 물려받는 것은 동물원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동물원의 동물은 항상 대체되고 있었다. 오랜 시간 동물원을 들여다보고 있었으면서도 그 사실은 알지 못했다. 알지 못하니 물을 수도 없었다.

게르 지붕으로 빗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자리를 정리하고 밖으로 나왔다. 소리만 요란했지, 비는 한 두 방울 떨어지는 정도다. 우리는 사무실을 향해 걸었다. 물범사가 있던 자리에 새로 들어선 수달사가 보였다. 수달사의 연못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범돌이, 범순이가 제주로 떠나던 날도 비가 왔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책 본문 pp.156-167

 

+

우리가

동물원의 동물이 죽으면 슬프고 미안하고 괴로워하게 되는 것은

갇혀 살게 한 것 때문일까

이름붙여 키웠기 때문일까

동물은 죽어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였으면 좋겠다.



(*)출판사로부터 가제본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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