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에세이들은 읽는 동안은 촉촉하게 빠져들고 마음이 즐거워지게 되지만, 읽고 나면 다시 생각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어린 시절에는 그런 예쁜 글들을 자주 읽은 기억이 있다. 아름다운 단어들로 치장한 멜랑콜리한 감정들의 나열이 그저 사랑스럽던 시절이었고, 나도 그런 글들을 써서 친구에게 보낸 기억도 있다. 친구는 무척 기뻐했다.
그러나 나이를 조금씩 먹으면서 그저 조금은 딱딱하더라도 이상하게 마음이 끌리는 이야기라는 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건조한 어투로 자기의 생각을 전달하지만 그 이야기에 공감하기도 하고 다시 찾아보고 싶어지는 글. 예쁜 글들이 달달한 음료수라면 곱씹게 되는 그런 나물같은 글들 말이다.
이미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라선 무라카미 하루키의 <잡문집>은 그런 기대를 갖게 했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그의 소설들을 주로 보았고, 수필집이라고는 <먼 북소리> 단 한 권을 읽었기 때문에 이 책을 통해서 유명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면면을 알게 되는 일이 퍽 즐거웠다. 그의 나이가 이미 예순을 훌쩍 넘긴 나이라는 것도, 그가 연극영화를 전공했다는 것도 자세히는 몰랐다. 그의 글을 읽을 때 음악에 관한 해박한 지식과 섬세한 애정이 깃들어 있음을 느끼곤 했는데 젊은 시절 오로지 음악만을 듣고 싶어서 재즈카페를 운영하기도 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클래식과 재즈는 이름만으로도 어딘지 거리감이 느껴지는데 그는 쉽고 재미나게 음악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래도 모르는 뮤지션의 이름은 그 사람이 그 사람 같기도 하고, 어떤 곡은 제목조차 낯설기도 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의 많은 지면을 할애한 그의 재즈에 대한 사랑은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리고 많이 언급되는 음악들은 찾아서 듣게도 되는 것을 보면 글이 갖는 힘이라는 것은 진정 무시못할 것이긴 한 모양이다.
이 책에는 대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사랑하는 작가와 소설들, 음악가와 연주곡 그리고 사람들과 음식들이 자리하고 있다. 때로는 작가의 하루를 따라가기도 하고, 때로는 그의 어린 시절을 훔쳐보며 이방인인 작가를 가깝게 느끼는 착각을 불러온다. 다만, 제목 그대로 잡문집이다 보니 그야말로 꾸준한 어떤 것을 발견하기는 좀 어렵다. 그저 그가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 이야기들을 들을 뿐이다. 아니면 나도 마음 내키는 대로 이곳저곳을 펼쳐보아도 좋고.
"여기 있는 이 사람들 모두가 각자 심오한 인생을 사는구나. .....그래,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고독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고독하지 않다."
본문 25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