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포스트는 출판사 창비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은 뒤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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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길위에 서서 죽었습니다. '길'이라는 공간은 어제도 친구와의 약속에 나가기 위해 지났던 곳이고, 오늘도 책을 읽기 위해 카페로 향하며 지났던 곳입니다. 그런 길위에서 죽은 사람이 159명입니다. 누군가는 이 참사를 '정치적' 사건이라고 합니다. 이 책은 "애도"할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책을 보며 '누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애도의 기회를 박탈하고 사람들을 숨게 만들었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놀러가서 죽었다'는 말은 비난의 의도를 표현하기 위해 쓰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놀러가서' 죽었다는 말은 그 자체로 참 이상합니다. 무고한 이들의 희생이라는 말을 이보다도 더 적확하게 표현하기도 어렵게 느껴집니다. 이들은 어떤 의무나 책임도 없이, 어떤 위기에의 전조도 없이 일상 속 여가를 즐기다 희생된 무고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희생을 "정치적"으로 독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반드시 책임을 느껴야 할 누군가가 그것을 의도적으로 방기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참사를 정치적이라는 단어와 함께 묶어 몰아가는 것에서는 어떠한 악의가 느껴집니다. 입에 올리기 부담스러운 것으로, 수치스러운 것으로 치환해야 입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상에서의 참사가 누구도 애도하기 부담스러울 정치적인 사건 하나로 치환되는 일이 한국사회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이 책과 마찬가지로 서평단 활동을 위해 읽고 있는 책이 한권 더 있는데요. 그 책(『국토박물관 순례 1』)의 279면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습니다.
'중국이 이 문제(동북공정)를 정치 쟁점화하지 않고 학술적인 연구에 맡기며 한국의 관심을 고려한다는 구두합의를 하면서 일단 갈등이 봉합됐지만 그 여진은 아직도 남아 있다. 환인과 집안의 고구려 유적과 연길의 발해 유적에 대한 한국인의 관광을 철저하게 통제하여 출입을 막는 것은 물론이고 사진조차 찍지 못하게 하는 것을 보면 동북공정의 진짜 목적이 무엇이었는가를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갑자기 이 단락을 가져온 이유는 '정치적'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국가시스템이 나서서 피해자 가족들의 만남을 가로막으며 진실에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고 애도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고, 유가족들이 진실에 접근할 수 있도록 요구하는 것은 정치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작은 따옴표로 인용해온 문장의 케이스에서, 우리 역사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노력은 정치적이고, 그에 선행된 동북공정은 정치적이지 않은 걸까요? 사실 저는 정치적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무언가에 '정치적'이라는 딱지가 붙으면 그건 쉽게 언급해서는 안 될 것이 되고, 그것에 대한 견해를 가지는 것은 예민한 문제로 취급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콘서트에 같은 날 자리했다는 것만으로 서로에게 유대감을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하물며 그런 거대한 참사 앞에 그 일을 함께 겪어낸 희생자의 주변인들이 '애도의 공동체'가 되어버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희생자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참사의 진실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하는 건 그들이 애도를 위해 온당히 갖는 권리이고요. 이것에 대한 이야기가 '정치적'이고 '예민한' 이야기로 탈바꿈되는 속도가 너무 빨랐던 것은 놀랍고 황당하기까지 합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정치'는 본래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따위의 역할'을 합니다. 우리의 삶을 인간적으로 영위하기 위해 우리는 '정치적'으로 사고하고 살아갑니다. 어째서 10·29 이태원 참사만큼은 '정치적'이기에 쉽게 꺼낼 수 없다는 말이 나오는 일이 되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분량을 보고 가늠해본 기간보다 실제 읽어내는 데에 걸린 기간이 훨씬 길어진 책입니다. 우느라 그랬습니다. 증언 속 희생자들 모두가 주위에 있어도 이상치 않을만큼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일독을 진심으로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