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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dwn5599의 서재
  • 마른 여자들
  • 다이애나 클라크
  • 15,120원 (10%840)
  • 2021-07-30
  • : 277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정말 놀랍다. 이게 처음 쓴 소설이라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는다.

너무 상투적인 표현이라고 느껴질 수 있지만, 내가 서술할 수 있는 가장 진심의 표현으로 작성한 문장이다. 만일 나에게도 미각이 연결된 쌍둥이가 있었다면, 이 책을 읽는 내내 그 미각을 통해 달콤하고 부드러운, 풍부한 버터맛이 느껴졌을 것이다. (내가 이 책은 별로였다고 한다면 그 미각을 통해 쓰디쓴 비누맛이 났을 것이다.) 묘사도, 서술도, 분위기도 독특한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시작한다.

우선 이 책은 주인공 로즈와 주인공의 쌍둥이 언니이자 미각이 연결된 릴리, 로즈의 학창시절 선망대상이자 친구 제미마, 릴리의 현남친 필, 필의 부인인 라라 정도가 주요인물이다. 사실 임팩트 있는 인물이 조금 더 떠오르긴 했는데, 너무 많이 적으면 수습하기 피곤해지니까... 생략하기로 했다. 로즈는 극단적 거식증에 시달리고, 릴리는 늘 로즈의 몫까지 먹어주다 못해 폭식을 하며 자신을 학대한다. 제미마는 로즈가 거식증 문화에 발을 들이게 한 인물이다. 둘 사이 성적인 긴장감이 늘 존재했고, 그로 인한 강렬한 흡입감이 로즈가 거식증을 자신의 일부분으로 여기게끔 한 것은 물론이다. 릴리는 폭식과 연애를 통해 자기자신을 학대한다. 이 행동이 점점 심해지다 못해 유부남이면서 릴리에게 많은 것을 강요하는 필을 만나기 시작하는데, 이것을 계기로 로즈가 백색 공간 같은 시설에서 나와야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필은 부인인 라라와 함께 다이어트 식품 관련 사업을 하고 있고, 라라는 필의 외도를 알면서도 감내한다. 같이 다이어트 관련 사업을 하면서도 필과 라라의 태도는 분명 다른데, 라라는 다이어트가 좋은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아보이는 반면, 필은 다이어트를 정말 돈을 벌기 위한 도구로 다룬다. 그래서 희생자가 발생했을 때 둘의 의견이 첨예하게 갈린다. 여기까지 대충 요약을 해보았는데, 이렇게 많은 내용을 적어두어도 괜찮은 것인지 불안하기는 하지만 일단은 이어서 적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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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거식증을 공룡이라고 생각했다. 티라노사우루스 렉스의 먼 친척뻘일 거라고, 아마도 육촌쯤 되겠거니 생각했다. 연한 베이지 색의 아름다운 자태가 떠오른다. 긴 목과 호리호리한 몸매. 키가 더 크고 몸이 투명하면서 말이 아닌 말이 혹시 존재한다면, 그 말이 바로 거식증이었을 것이다. 당신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 없다, 이미 가버렸을 테니까.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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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비유는 주인공인 로즈의 입장에서 서술되었다. 공룡 혹은 말로 묘사되는 관념, 거식증은 결코 작지 않다. 그리고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결국 그것은 내부에서 자연발생한다기보다는 외부자들에 의해 체화된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외부자로 이를 테면 '필' 같은 인물들이 있다) 이 책에서는 '마른 몸'을 대하는 다양한 입장을 볼 수 있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부류는 릴리의 전남친들이었다. 그들은 뚱뚱한 여성인 릴리와 데이트함으로써 본인이 얼마나 대단한 페미니스트인지 과시하려는 부류였는데, 로즈는 오히려 그들의 이런 태도가 역겹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들이 사실은 마른 몸을 가진 여성을 더 바람직한 모습으로 여긴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행동이라고 생각해 로즈와 같은 역겨움을 느꼈다. 그들 중에 '릴리'를 봐준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누구 한명이라도 '릴리'를 보았다면 이후 릴리가 스스로를 학대하려는 듯 이상한 남자들만 골라 만났을 리 없기에. '릴리'는 로즈에 의해 뒤늦게 발견된다. 릴리의 단편집, 그건 릴리의 역사였다.

이 책의 가장 독특한 서술법은 본심과 실제로 뱉은 말을 차례로 나열하는 술법이었다. 이 서술의 특이함이 극대화되는 지점은 아무래도 릴리와 로즈, 이 쌍둥이는 서로의 감정을 미각으로 느낄 수 있다는 부분에서였다. 릴리는 로즈가 본심과 다른 말을 뱉을 때마다 미각으로 로즈가 거짓을 뱉는 중임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둘의 대화는 마치 그런 사실은 없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즉, 소설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간흐름에서 릴리는 로즈의 본심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로즈가 시설 바깥으로 나와 릴리를 목격했을 때, 그때 이후부터가 둘의 제대로 된 대화이다. 필에게 학대당하는 릴리에게 진심을 표현하기 시작한 그 시점 이전에 둘 사이에 오간 말은 대화라기 보다는 기만에 가깝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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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세계무역센터의 쌍둥이 빌딩 중 첫번째 건물이 공격받았을 때 두번째 건물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건물 안에서 대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하나가 표적이 되면 다른 하나는 괜찮을 거라는 듯이. 쌍둥이 빌딩 중 하나는 멀쩡히 서 있고 하나만 무너져내릴 거라는 듯이.

(6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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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작가가 이 사건을 보고 이 책의 플랏을 떠올렸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부분이라 따로 인용해왔다. 결국 쌍둥이는 함께 무너졌지만, 서로를 일으켰다. 밈과 리즈와 릴. 거식증 치료를 위해 시설로 들어가겠다던 리즈의 말이 밈을, 릴을 위해 시설을 나오기로 결심한 리즈의 마음이 릴을, 편지를 보내며 끝까지 리즈를 찾았던 밈의 진심이 리즈를 구했다. 실로 어마어마한 구원서사였다.

다른 사람들이 보시기에, 이 정도면 그다지 길지도 않은 서평일지 모르겠으나 내게는 이 서평이 인생을 살면서 쓴 모든 리뷰를 통틀어 가장 긴 글이었다. 대체 어떤 내용이었기에 이 사람이 이렇게 좋아하는 것 같은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한분이라도 있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 본 도서는 창비 서평단 활동으로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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