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성과 관련한 묘사가 많은 책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냥, 취향이다. 그래서 한장한장 넘기기가 힘겨웠다. 500 페이지 내내 성기에 대한 묘사, 다양한 상황, 장소에서의 섹스가 반복된다. 나쁘게 말하자면 내 취향이 아니었고 좋게 말하자면 그만큼 사실적인 묘사로 가득하다. 보기 불편할 만큼 사실적인 묘사가 가져다주는 효과는 분명하다. 주인공이 특권층백인으로서 유색인종인 아서를 성적인 매력으로 가득찬, 예속적인 존재로 은근히 대상화하는 모습도, 그러면서도 그 자신도 동성애자라는 사회적약자에 속하기에 겪는 일도, 더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읽는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윌리엄과 찰스의 경험이 중첩되는 것도 중첩되는 건데, 그 위로 묘하게 겹쳐지는 풍경이 있기 때문이었다. 해외에서 겪었던 캣콜링(동양인 여성이라면 여행하다 한번쯤은 겪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고등학생 시절 친하게 지내던 남자애가 길거리의 모르는 여성에게 퍼부었던 무례하고 몰염치하던 평가. 상대방을 나와 동등한, 감정을 느끼고 사고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기에 행할 수 있던 모든 행위.
사실 이 책의 서평단을 신청했을 때, 정말 책에 대한 사전정보 하나 없이 신청했다. 옵저버의 짧은 서평 하나만 보고 꽂혀 신청한 것이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용감한 책이다. 반박하지도, 사과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들의 삶에 관심이 있고 그럴 필요가 있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던질 뿐이다. 여성이 배제된 특정한 남성들의 세계에 대한 이 책의 그림은 언제나 진실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이 불쾌하다면, 진실의 본성이 그렇기 때문이다.' 읽어본 결과, 정말 그랬다. 덧붙일 말도 뺄 말도 없었다. 이 책의 인물은 사과하지 않는다. 그저 실패를 겪는다. 윌리엄은 자신이 구원이 될 수 있다는 자만감에 푹 젖은 채로 아서에게 가던 길에 무자비한 폭행을 겪는다. 그 역시 사회의 소수자인 동성애자였기에.
이 시점에서 최근 영화 미나리로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윤여정 배우님의 조언이 떠올랐다. 성공에 대한 압박과 부담에 시달리던 나영석 PD에게 건넨 조언이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너는 크게 한번 실패해 봐야 진짜 좋은 인생이 열릴 거야." 주인공이 반박도, 사과도 하지 않음에도 우리가 찝찝함을 덜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주인공이 실패를 경험하기 때문이 아닐까. 자신보다 훨씬 열등하다고 생각한 인물에게 애인을 빼앗기는 주인공의 모습, 시혜적인 마음으로 아서를 찾아 가다가 겪는 무자비한 폭력. 그가 무의식적으로 가져온 우열의 기준이 '특권층백인'중심의 시각으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그가 깨달았을 것이라고, 소수자를 구원하는 일은 사실 시혜적으로 베풀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그가 온몸으로 겪어나가며 배울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