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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기적 인간

새해 계획 같은 건 원래 믿지 않았었지만 그래도 새해가 되었으니 새로 무언가를 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은 있었다. 여성주의 책 읽기를 시도해 보고자 1월 선정 도서인 『육식의 성정치』도 샀고, 1월은 아무쪼록 일이 바쁘겠지만 365일이 이런 식이지는 않을 테니까 주말에라도 짬을 내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정확히 일주일 만에 깨졌다. 부서 이동과 함께.


많은 것을 느꼈다. 배신감은 말할 것도 없고. 회사에 느낀 배신감은 아니다. 원래 회사는 이런 곳이라고, 기대를 하지 않았으니. 상황이 그렇게 만든 것일 뿐인데 나를 탓할 수 있나?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이렇게까지 쓰다가, 생각이 더 길어지면 혹 이 모든 것은 나의 피해망상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평소에 지독히도 싫어하는 ‘가는 데마다 헬 파티면 네가 구멍이다’ 식의 ‘책임론’이 어쩌면 내 경우일 수도 있겠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동종업계에 있는 사람이 쓴 신간이 전자책으로 나왔기에 사서 읽어보았다. 사실 굳이 살 정도일까 반신반의했었지만 도서관이 언제 다시 열지 몰랐고 희망도서는 신청해도 언제 들어올지 몰랐으니까. 그리고 혹시나는 역시나였다. 책을 읽고 나니(사실은 한 번 훑어본 것뿐이지만) 누군가가 기분 나쁘게 귓가에 대고 내 미래를 속삭이는 것 같아 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너는 대단한 글을 쓰지 못할 거야, 네가 잘 쓴다고 생각하는 글도 편집을 거치고 책으로 나오면 다 이런 식일 거야, 너는 특별하지 않아, 남은 생도 그럴 거야.

 

새로운 부서에서는 사람들의 ‘깨진’ 글을 보거나 말을 듣는다. 표현은 사안에 따라 다르지만 그 글/말의 아래에는 엄청난 분노가 있다. 그러나 나는 분노할 수 없다. 어떻게든 회사 차원에서 예의 있게 대답이 나가도록 해야 한다. 그가 얼마나 악의를 가졌는지와 관계없이. 그냥 회사가 인정한 폭탄처리반이다. 빈말로라도 좋은 자리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을 여태껏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렇지. 회사는 개개인의 사정을 모두 헤아릴 수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 그러면 내 인생은? 내가 입사하겠다고 선택한 회사니 어떻게든 견디는 것도 내 책임인가?

 

마침 세 달 대여로 구입한 전자책의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아 훑어 봤더니, ‘감정의 전염’에 관한 부분이 눈에 띈다.

 


남의 기분에 영향 받지 않기 위해서는 기분의 출처를 정확히 해야 한다. 타인에게 전염된 기분이라고 판단되면, 과감하게 쳐내는 연습을 해 보자. 남의 감정까지 내가 감당해야 할 의무는 없다. 지금 나의 기분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만 깨달아도 그 무게가 훨씬 가벼워져서, 내 안에서 흘려보내는 일이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네 감정은 내 것이 아니다」,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 中



그러니까 위의 모든 내용을 머리로는 안다. 내가 상대하는 사람들이 원래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그냥 하나하나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된다고, 머리로는 이해한다. 그러나 속된 말로 ‘시달리고’ 나면, 겉으로는 ‘하하, 오늘도 조금 힘든 하루였네요’ 하고 태연한 척 할 수 있겠지만, 마음에는 얼룩이 남는다.

 

모두가 꿈을 꾸지만 대다수는 그 꿈을 이룰 능력이 없다. 아이들은 결코 자신의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고는 투정을 부리기 시작한다. 남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고 불만만 가득하다. 왜 자신이 실패했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은 그 절정이다. 한 번도 거절당해본 적이 없는 아이 중의 아이는 “네가 잘못된 건 다 세상 탓이고, 소수자 탓이고, 다른 나라들이 미국을 등쳐먹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물론 세상은 잘못되어 있고, 당신의 불행한 삶이 당신 잘못만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당신 탓이고, 투정 부린다고 해결될 것도 없다. 세상은 그렇게 굴러간다.


-「꿈만 꾸는 아이의 세계, 꿈을 팔거나 불만을 팔거나」, 『믿습니까? 믿습니다!』 中


전후 맥락을 보면 필자가 비판하는 대상은 명백하다.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어서 자신의 모든 꿈이 ‘마땅히’ 실현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반사회적으로 구는 이들이다. 그러나 나는 ‘어느 정도는 당신 탓’이라는 말이 나에게도 해당되는 것처럼 읽혀 자꾸 신경 쓰인다.


어쩌면 나는 내가 남자라는 이유로, 좋은 대학을 나왔다는 이유로 가족과 사회로부터 과보호를 받은 것은 아닐까? 상황이 어떻든 이제는 내 구체적인 잘못과 관계없이 내 책임을 인정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면 나는 내가 지금 느끼는 이 수많은 부정적인 감정-패배감, 좌절감, 분노, 우울-을 ‘셀프로’ 통제해야 하는 걸까? 결과적으로 ‘나의’ 선택이니까?


구조가 개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생각은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요즘에는 그 생각이 더 확고해졌다. 각자도생이 ‘시대정신’으로 통용되는 요즘의 세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지, 회사에서 겪은 일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특정한 방향으로 등을 떠밀고는 책임지지 않는 구조와, 그 구조를 만드는 데 기여했으나 별 생각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화가 점층적으로, 그라데이션으로 올라온다.



그래서 요새 이런 책들을 읽는다. 두 책(하나는 무크지)의 공통점은 1. 구조 속의 개체를 환기시키며, 2. 글의 길이와 밀도가 적당하여 요즘 같은 위기상황(?) 속에서도 읽을 수 있다.

 

생각이 길어지면 다다르는 결론은 언제나 같다.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누군가에게 읽히는 글을 쓰지 말자. 지금이 그 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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