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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기적 인간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닷새는 모처럼 ‘연휴’의 이름값에 걸맞은 기간이라고 생각한 내가 어리석었다. 닷새를 쉬어도 또 닷새를 더 쉬고 싶다.

    

 

이번 추석 연휴는 유독 제발 어디 내려가지 말고 집에만 있으라고 정부 차원에서 권하니, 원래도 어디 내려가고 하지 않았던 나는 ‘코로나19 확산 방지’라는 명분까지 얻어 정말로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연휴 전야부터 오늘 이 시간까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최소한의 생활(잠, 식사, 화장실) 이외에는 이것저것 잡히는 대로 종이책이며 전자책이며 읽었다. 그야말로 ‘꿈의 연휴’였다. 잠깐, 꿈이라고?

    

 

응 꿈이야.

    

 

그렇지, 배우자와 아이가 있으면 아무도 신경 안 쓸 수가 없다. 나의 휴식을 위해 다른 사람의 수고가 더해질 수는 없다. ‘제사’를 위해 내려간 일이 없는 것도 맞고 연휴 기간 동안 책을 평소보다 더 읽은 것도 맞지만 연휴에 주로 한 것은 바깥바람 쐬기(동네 산책)와 집안일이었다. 다른 때의 주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 고로 제목에서 ‘아무 걱정 없이’는 ‘낚시’다. 죄송.

    

 

이웃 분들의 연휴 독서 기록을 보고 닷새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는 것을 실감한다. ‘애매한 재야 고수’(김영민)라는 표현도 있지만, 내 독서의 양질을 견주어 보면 나는 애매한 고수도 아니고 그저 명확한 먼지 1일 따름이다. 다음은 먼지의 기록.

    

 

연휴 전 주(9.21.~9.27.)에는 지역 도서관에 대출예약을 한 세 권을 무사히 빌리는 데 성공했다. 그 중 한 권은 이중톈의 『삼국지 강의』 2권! (원제 品三國 下) 전자책으로도 나와 있다면 조금 더 좋을 텐데 생각했다가, 대출한 종이책 실물을 보고 생각을 바로 거두었다. 이 정도 두께의 종이책을 전자책으로 옮기면 몇 날 며칠을 스마트폰 화면 들여다보느라 눈 나빠지겠구나... 차라리 다행이다. 뭐 이런 심정.

 

여튼 대출한 그 날부터인지 그 다음날부터인지 읽기 시작해서 3분의 1 지점 즈음까지 읽었다. 여전히 설득력 있는 논증으로 가득한 글이라 읽는 데 행복했으나 중간에, 그러니까 연휴의 시작과 함께 샛길로 빠지는 통에 진도가 예상보다 더디었다. 다음은 샛길의 목록.

    

 

『신라 공주 해적전』은 곽재식의 근작인 경장편인데, 『삼국지 강의』의 영향으로 고문체(古文體)에 중독된 나의 갈망을 맞춤형으로 해소해 주었다.

 

결말에서 주인공의 심리가 자세히 나타나 있지 않아 나는 나대로 그의 심리를 추측해 보았다가, 그런 일련의 추측들이 실은 기존의 영웅 서사들이 지닌 문제(도구화의 문제 등)를 반영하기 때문에 작가가 ‘일부러’ 나타내지 않은 것은 아닌지, 하고 고쳐 생각하게 되었다.

 

문장이 가-끔 어색한 것을 제외한다면, 곽재식은 진정 21세기형 하이브리드 스토리텔러가 아닐까. (그러나 그가 글쓰기 책에서도 이야기했듯 완전무결한 글을 쓰느라 마감이 늦는 작가보다 마감에 맞추어 평균적인 글을 써 내는 작가가 독자에게 더욱 사랑받는다. 그는 의심할 바 없는, 21세기 한국에 맞춤한 작가다.)

 

 

이희호 선생의 자서전은 그의 서거 이후 전자책이 출간되었기에 서둘러 구입했으나 그때는 하루 이틀 안에 읽기는 어려워 보여 제쳐 두었었다. 무려 나흘이라는(이미 하루 줄었다) 시간이 주어졌으니 한 번 읽는 데까지 읽어 보자는 심산으로 첫 페이지를 열었고, 연휴가 끝나기 한 시간 전에 다 읽었다.

 

책에는 간략하게 표현된 한 구절 한 구절에 얼마나 많은 인고의 시간과 번민, 고통이 담겼을지.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상상조차 어렵다. 그렇기에 절반의 반가움 한편으로 절반의 아쉬움도 느끼는 ‘사치’를 독자로서 누리는 것이겠지. (절반의 아쉬움에는 이희호 선생에 대한 것도, 김대중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기까지 선택했던 정치적 타협의 과정에 대한 것도 있다.)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인구의 절반인 여성이 차별받지 않고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받으면서 그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세상’의 실현을 평생 염원했던 이희호 선생의 지향을 고스란히 볼 수 있었던 것이 이번 독서의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전문직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영부인이 된 힐러리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힘이 느껴졌다. 그는 클린턴에 결코 뒤지지 않는 실력과 젊음을 겸비한 여성이다. (...) 이 같은 친분 관계를 떠나서 유능한 여성이 지구상에서 가장 힘센 나라의 대통령이 되는 날을 나는 손꼽아 기다린다. 여성이라는 상징성만으로도 세계의 여성들, 특히 제3세계에서 자라나는 여자 아이들에게 여성의 가치와 힘을 자각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힐러리 대통령이 외국 원수들과 정상회담을 하는 동안 그 배우자인 클린턴이 국빈의 배우자와 차를 마시면서 가벼운 담소를 하는 광경을 상상하면 무척 통쾌하고 한없이 즐겁다. 그는 평소의 풍부한 유머 감각으로 내조 외교도 천연덕스럽게 잘할 것이다. 지금까지 수동적이었던 배우자의 역할과 외교를 새로운 차원으로 높일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유쾌한 상상인가. 이 상상이 언젠가는 현실이 되면 좋겠다.

-「동교동으로 돌아와서」 中

 

 

 연휴를 하루 이틀 까먹다 정신 차려 보니 전자책 캐시 두 배 마일리지를 받을 수 있는 기간(매월 1일~3일)이 지났다. 어제는 기간이 지난 것을 알고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들었으나(‘한 달을 어떻게 기다려!’), 오늘은 ‘평소 완전 도서정가제의 취지에 동감한다면서 두 배 마일리지 적립에 불을 켜고 있는 것이 왠지 이율배반적으로 보인다’고 메타적 성찰을 했다. 관심 분야의 신간은 나오는 대로 사서 읽지 않으면-최소한 사지 않으면- 논의에 뒤처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는데, 한 달쯤 늦는다고 아주 많이 뒤처지거나 하지는 않겠지. 이번 달 독서목록은 도서관에서 빌린 책과 사 놨지만 안 읽었던 책으로 채워야겠다. (과연 계획대로 될지는...?)

    

 

일단은 잠을 자자. 그래도 이번 주는 나흘 출근하면 쉬는 날이라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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