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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기적 인간

처음부터 ‘길티’ 플레저를 일부러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소설집 한 권을 읽고 난 후 감상이 마치 삼단 논법처럼 연쇄 반응을 일으킨 결과였다. (특히 여성을 묘사하는 방식에 있어서) 윤리적, 미적 감각이 전반적으로 ‘구리다’(전제1), 이런 식으로 PC한 감각을 포기할 거면 재미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까지 재미가 있지도 않았다(전제2), 그러면 이 다음부터는 ‘길티’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최소한 ‘플레저’가 보장되는 작품이라도 찾자(결론).

 

한 사람이 평소에 안 하던 일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평소에 주로 어떤 책을 읽으세요?’라는 질문을 들으면 ‘사회과학 책, 아니면 한국사회 비평이나 시사 칼럼집 등입니다.’라고 답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읽어온 내게 ‘순수한 오락적 의도만을 위한 독서’는 ‘평소에 안 하던 일’이었다. 그러나 이유가 있다니까... 그 ‘이유’는 한 마디로 말하자면 스트레스다. 하찮고 똑똑하지도 않은데 별로이기까지 한 그저 그런 인간이 되어 간다는 자기인식, 분명하지 않은 방식으로 나를 힘들게 하는 환경적 요인, 어떠한 지적 활동(책읽기와 글쓰기, 비판적 사고와 자기 성찰 등)에도 에너지를 온전히 쏟기 힘든 상황, 비관적 자기인식의 심화….

 

한 사람이 평소에 안 하던 일을 하려면 평소에 하던 일을 하려는 것보다 배 이상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단순한 ‘플레저’를 찾는 길은 실은 끝이 어딘지도 모르는 자갈길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지역 전자도서관에 들어가 ‘소설’로 분류되어 있는 7백 몇 십 권의 목록을 휙휙 넘겨보다, 그저 ‘느낌’이 오는 대로 책을 골랐다. 별도 예약자가 없어 바로 대출이 가능한지도 중요한 선정(?) 기준이었다. 지금 당장 읽을거리가 필요한데 예약이 수십 건씩 쌓인 베스트셀러는 의미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고른 게 이 시리즈.

    

 

 

 

 

 

 

 

 

 

 

 

 

 

‘한자와 나오키’는 두 명의 콤비인 ‘한자’와 ‘나오키’가 아니고, 시리즈의 주인공 이름이다. 성이 한자와, 이름이 나오키. 명문대를 나와 남들이 선망하는 은행에 입사했으나 이후의 인생이 출세가로를 달리기만 했다면 이 소설은 시작하지도 않았을 터. 그의 입사 시점은 일본의 거품 경제에서 ‘거품’이 꺼질 즈음이었으니,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말을 떠올려보자면 그의 회사 인생은 시작부터 최악의 타이밍에 끼어든 셈이다. 다행히 본격적인 사건이 시작되는 시점은 한자와의 입사 후 10여 년 뒤로 그가 어느 정도 은행에서 자리를 잡은 때이나, 사건의 주도자이자 한자와의 적대자가 그의 상사라는 점은 결코 다행이 아니다.

 

이런 유의 추리 소설을 읽어 본 지도 상당히 오래인지라 책의 내용을 이야기할 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가능한 범위로 잡아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어차피 깊게 비평을 해야 할 부분이 많지는 않으므로, 혹시나 이렇게 재미없게 쓴 책 소개글을 보았음에도 내용이 궁금하다면 혹시 지역의 전자도서관에 책이 있는지 확인을 해 보시라고 권유하고 말 따름이다.

 

 

그렇게 지난 2주 동안 ‘한자와 나오키’ 시리즈를 3권까지 읽었다. 전자도서관에는 얄궂게도 3권까지만 있고 완결권에 해당하는 4권이 없어, 4권을 살지 말지 이틀 정도 고민했다. 그러다 다른 인터넷서점에서 ‘패턴이 어느 정도 예측되어 빌런만 바뀌고 전개 구도는 유사하다’는 취지의 평을 보고 4권 구입은 ‘일단 보류’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다. (분명 이런 평을 본 것 같은데 이 글을 쓰는 지금 찾아보니 또 없다. 뭐가 씌었던 것일까?) 나는 역시 귀가 얇고, 자기 주관이 희미하다. (내 주관을 굳이 덧붙인다면, 1, 2권에서는 꼬장꼬장 옳은 말만 했던 한자와 나오키가 3권 들어서 보이는 후배 세대와 엮이면서 보이는 약간 꼰대스러운 면모,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약간은 뜬금없이 튀어나온 것처럼 처리된 종반부가 4권 구입 보류의 ‘여러 원인’ 중 하나였다.)

 

전반적으로는 재미있게 읽었다. 추리 소설의 형식이지만 서사의 진행을 위해 쓸데없이 사람이 죽거나 하지 않는다는 점이 좋았다. 책 한 권 단위로 한자와가 해결해야 할 사건의 시작부터 끝까지 서술되어 있어,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다라서야 한자와의 다음 행보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있다는 점도 몰입도를 높였다. 그렇게 몰입하고 난 뒤에야 문득, 사람들이 이래서 옛날부터 권선징악의 스토리를 좋아했구나, 실감하기도 했다. 한국문학사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소설’은 오래도록 주류 계층에 의해 ‘잡문’ 취급당했던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권선징악을 주제로 하는 군담소설, 영웅소설 등이 기층 민중 사이에서 활발히 보급되어 널리 읽혔다.

 

권선징악이라는 주제만큼 선명한 판타지가 있을까? ‘좋은 놈’은 상을 받고 ‘나쁜 놈’은 벌을 받는다는 원칙은 현실에서 항상 실현되지 않기에 ‘판타지’이며, 현실에서는 누가 ‘좋은 놈’이고 누가 ‘나쁜 놈’인지 구분조차 애매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쉬이 허무주의나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현실이 더러워도 언젠가는 판타지가 비슷하게나마 현실의 세계로 내려올 날을 꿈꾼다. 권선징악의 주제가 아무리 진부해도 현실을 사는 사람들은 여전히 당대의 권선징악 드라마를 찾아 읽는다. 나 역시 어느덧 그런 사람들 중 하나다.

 

권선징악 드라마는 반복해서 봐도 재미있다. ‘한자와 나오키’ 드라마 시즌1 전편이 왓챠에 있다고 해 충동적으로 회원가입을 할 뻔했으나… 2주가 훌쩍 지나고 어느덧 유료구독의 열차에 나도 모르게 올라타 있을 것 같아(나라면 충분히 그러고 남는다) 회원가입 자체를 포기했다. 대신 오래 전에 읽다가 만 장강명의 소설을 집어 들어 어제오늘 60% 정도를 읽었다.

 

 

 

 

 

 

 

 

 

 

 

 

 

 

장강명은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약간 (좋은 표현으로는) 변한 것 같아 3년 전에 그에 관한 글을 하나 쓰고는 굳이 더 찾아 읽지 않았는데, 어느덧 다시 제 발로 돌아와 읽고 있다. 이쯤 되면 장강명은 나에게 애증이 맞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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