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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기적 인간

그 책은 결국 완독하지 않았다. 읽은 책을 기록하는 엑셀 리스트를 찾아보니 작년 4월 중하순에 읽기 시작한 것으로 나온다. 그러고 보니 그 책을 심상하게 펼쳐보았다가 읽기에 가속이 붙어 업무적으로 바쁜 시즌이었음에도 불구하고(=그래서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시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벽까지 휴대폰을 놓지 못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전자책 어플에는 책의 74% 부분까지 읽은 것으로 나온다. 왜 나는 그 책을 끝까지 읽지 못했을까.

 

다른 책의 경우에도 진도의 8부 능선을 다 넘어서는 끝내 읽지 못한 적이 더러 있으니 그 책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실 그 책을 읽으며 중간 중간 밥알에 섞인 모래알 같이 걸리는 지점이 더러 있었다. 그러면 선택을 해야 했다. 책을 끝까지 읽고 ‘전반적으로 괜찮았지만 이러이러한 지점은 걸렸다’라고 감상을 남기든가, 인류의 고전으로 남을 책이어도 내 성에 차지 않는 지점이 있으므로 지금 여기서 당장 책읽기를 그만두든가. 나는 선택을 하기는 했다. ‘애매한’ 선택.

 

김영하는 책을 읽는 데에서조차 ‘다른 사람이 그 책을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신경쓰지 말자고 제안했다. 아니, 강력히 권고했다. (그의 산문집 『말하다』에 이런 내용이 있을 텐데, 정확히 찾아볼 수가 없다. 양해를.) 그러나 나는 그 권고를 따르지 않았다. 그 책을 읽다 의구심이 든 순간, 나는 가장 쉬운 길, 그러니까 ‘다른 사람은 뭐라고 했을까’를 찾아보았다.

 

인터넷서점의 서평은 칭찬 일색이어서 별 가치가 없었고(특히나 ‘시장에서 한창 상한가를 친다는’ 책들의 서평은 ‘서평’이란 말이 무의미할 정도로 비평값이 없다), SNS를 찾아봤다. 이런 식의 모래알은 보통 공감을 얻기 어려운 성질의 것이어서, SNS에나 한두 마디 끄적이는 식으로 적어놓았을 확률이 높다. 역시나, 있었다. 많지는 않지만 있다고! 그 모래알이 밥알이 아니고 모래알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나는 이렇게나 집단주의적인 사람이다. 나 자신의 판단조차 그대로 믿지 못하고 동조하는 의견을 내는 사람을 반드시 한 사람이라도 찾아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사람.

  

  

내가 그 책에서 느낀 모래알은 두 가지.  

 

첫째, 미리 찾아본 부정적 평에 따르면 ‘비유가 과도하다’라고 했지만 나는 그게 딱히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음의 구절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자신도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행복감에 젖은 강 씨는 매일 밤 봉긋하게 솟은 가슴처럼 부푼 꿈속에서 잠이 들었다.”

 

전후 맥락을 따져 보아도(그냥 사기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는 중이었다), 비유의 원관념(부푼 꿈속)이 가진 성질을 생각해 보아도, 부적절한 비유라는 건 명확해 보인다. 내가 훌륭한 책에 구절 하나 트집 잡는 쫌생이인가? 평균 중년 남성의 젠더 감수성이라는 건 이 정도라고 양해를 해 주어야 하나? (74%까지 읽는 동안 전자책에 표시한 메모를 보니 ‘빻음5’까지 있다. 위와 같은 표현이 저것 하나뿐 만은 아니었다고 그 당시에도 생각했던 것이다)

 

둘째, 저자의 능력은 뛰어나 보인다(그러니까 책도 썼겠지). 그러나 그 뛰어남을 자신하는 것이 지나쳐 ‘다른 사람들은 가벼이 여기는 본질을 나는 꿰뚫어 본다’고 드러내는 부분이 있었다. 인권운동가들을 유독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들로 보는 시각이 아주 적나라했는데, 여기에 대한 내 대답은 두 가지. “그 사람들이 그걸 모를까요?”(책을 읽을 때 든 일차적 반문), 그리고 “님이 모든 사람을 의심하는 게 직업이듯 인권운동가는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활동을 전방위적으로 하는 게 직업인데요?”(글을 쓰며 떠올린 반문)

 

보통 ‘다른 사람이 모르는 걸 나는 알지’라는 태도는 ‘합리적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태도다. 그런 태도는 재수도 없거니와, 사실과도 맞지 않는다. 실은 그런 사람들이 더 모른다.

  

  

어찌 되었든, 전자책에는 접었다 편 책 모서리도 없으니, 새로운 마음으로 남은 26%를 읽을 수도 있지 않을까? 정말로 좋은 책이라면 그럴 수 있다. 수년에 걸쳐 읽는 명작도 존재하는데, 하물며 한 권짜리 책이야. 그러나 나는 끝내 이 책을 읽지 않기로 선택했다. 일주일 전 총선의 결과 때문이다.

 

 

여당의 전례 없는 압승, 야당의 참패... 이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다. 나는 사람들이 별로 주목하지 않는 한 지역구의 개표 결과를 유심히 지켜보다 쓴 입맛을 다셨다. 그 책의 저자는, 결국 당선되었다. 내가 절대로 표를 줄 일이 없는 당적을 가지고.   

  

나는 따지고 보면 내가 그렇게나 싫어하는 ‘사후확신편향’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것 아닌가? (‘사후확신편향’은 다른 말로 ‘내 그럴 줄 알았어(I knew it)’다) 결과를 다 보고 나서야 일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인과율의 실에 꿰는 일만큼 쉬운 일이 어디 있는가? 별도의 성찰과 전망 없이도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사후확신편향을 이야기하는 사람의 공통점은 정말로 자신이 ‘처음부터’ 그 일이 그리 흘러갈 줄을 알았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괜히 ‘확신’이라 하겠나. 당신에게는 성찰이 없다는 것도, 당신의 깊이는 얕다는 것도 결과가 나온 이후에는 말할 수 없다. 모든 것은 결과가 ‘증명’하니까.

 

그런데 그런 짓을 내가 하고 있다니. 나는 역시 이 세상에 흔한 군중1, 시정잡배1이다.

  

  

내가 요 며칠간 집중해서 완독한 에세이집(?)은 그 책과 공통점을 몇 가지 공유한다. 첫째, 저자가 소위 말하는 ‘전문직’이다. 둘째, ‘시장에서 상한가’다. 셋째, 다 읽고(혹은 읽는 도중에) 석연찮은 지점이 몇 있었다. (마음에 들어오는 구절도 몇 있었지만, 석연찮은 지점이 있었다는 문장 바로 뒤에 마음에 들어오는 구절을 붙이면 누가 그 ‘진정성’을 믿어줄까?)

 

내가 이 에세이집의 저자를 완전히 비토veto하지 않는 건 그가 아직은 당적이 없어서이기 때문일까? 이렇게 협의의 정치에 집착하는 소인배라니. 나는 내 일조차 앞으로 잘 소화해내기 글러먹은 모양이다.

  

  

에세이집까지 읽고 나니 저자의 전작을 모두 한 번씩은 읽은 셈이 되었다. 비교적 유망한 신진(?) 작가를 잘 발견하는 것은 중요하다. 몇 권 안 되는 책을 나올 때마다 읽고는 ‘나는 떠오르는 대세 누구누구의 책을 모두 읽은 전작주의자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누구한테 할 수 있을까? 책 이야기를 대놓고 좋아하는 사람은 주위에 몇 없어 보인다)

 

시간과 돈, 에너지, 그리고 육아로부터의 해방(가장 중요하다)이 주어진다면 꼭 얻고 싶은 타이틀이 있다. 바로 ‘강준만 전작주의자’라는 타이틀.

 

하지만 내 독서 속도로는 남은 30대를 그의 역사 산책 시리즈 읽기에만 바쳐야 할지도 모른다. 많은 것이 제약되는 환경에서의 책읽기는, 선호하는 책의 주제나 유형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 영향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고 싶지만 현실은 다섯 시간 뒤의 기상을 걱정한다.

 

 

나는 왜 그 모래알이 씹히는 순간에 그 책의 모래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었을까?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리만큼 의식하기 때문에, 모래알을 이야기하는 순간 그 책을 좋게 보았던 사람들이 나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는 것까지 염려했던 것일까?

 

‘개취’로 모든 것이 용인되는 시절에 ‘개취’를 말하지 못하는 역설. 나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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