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살아있는 동안 결코 시간에서 벗어날 수 없다.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은 유한한 시간 속에서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에 대한 문제가 곧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고 실존적 삶에 대하여 이야기한 이는 하이데거였다. 그는 그의 주저<존재와 시간>에서 ‘시간을 모든 개개 존재이해 일반의 가능한 지평으로 해석하는 것이(<존재와 시간>, 이기상 옮김, 까치, p.13)’ 그 책의 잠정적 목표라고 말했다. 지넷 윈터슨이 셰익스피어의 <겨울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시간의 틈>에서도 마찬가지로 시간은 책의 사건들과 인물들을 이해하는 한 열쇠이다. 동시에 이 작품의 이해는 우리의 삶에 대한 진실을 통찰하는 것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시간의 틈>의 이야기 뒤에 가로놓인 지평선은 우리 현실과도 맞닿아 있으므로.
사랑과 우정
언제나 사랑과 우정 사이의 갈등이 문제다. 리오와 지노는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다. 둘은 서로 성행위를 한 적도 있기에 단순한 친구 이상의 존재라고 해야 더 정확하겠다. 두 사람은 서로의 미묘한 감정들을 지닌 채로 각자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살고 있다. 그러나 리오와 지노는 여전히 가깝게 지내고(88페이지에 따르면 ‘리오의 집에는 지노의 방도 몇 개 있었다’고 한다), 지노는 리오의 부인 미미와도 무척 친한 사이이다. 리오는 지노와 미미, 두 사람의 사이를 의심하고, 자신의 집에 웹캠을 설치한다. 후에 웹캠에 찍힌 영상에는 두 사람이 서로를 무척 친근하게 대하는 장면이 있었지만 성행위를 하거나 다른 특별한 장면은 없었다. 하지만 심한 의심에 사로잡힌 리오는 그것이 두 사람이 바람을 피운 증거라고 생각한다. 이 생각은 이제 리오의 내면에서 확고한 기정사실로 되어버린다 - 그는 임신중인 미미에게 자신있게 “난 당신에 대해 다 알아(p.129).", "지노랑 바람피운 지 얼마나 됐어?(p.128)"라고 말한다. 분노한 리오는 자동차로 지노의 생명을 위협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객관적 진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리오에겐 오직 자신의 내면이 일그러뜨린 현실만이 사실이었고, 일그러진 현실은 자라나서 더욱 큰 문제가 되어버렸다. 리오가 투사한 것에 계속 집착하자 일종의 편집증의 증상마저 보이게 된 것이다. 그 증상은 종국에는 자기자신을 대상으로 향한 것으로 전이되고, 리오는 더욱 괴로워진다.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사건은 리오의 심리상태를 볼 때, 이미 예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이전에 리오는 정신분석 전문가에게 6개월 동안 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 그곳에서 바르츠 박사는 리오의 내면에 ‘혐오하는 동시에 사랑하는 대상’을 그가 대상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대상의 규정은 사랑하는 동시에 질투하는 미미라는 대상이나, 사랑과 우정, 증오의 감정이 섞인 지노라는 대상에 잘 부합하는 설명이다. “다른 인간을 정말로 알 수 있을까요?”라는 리오의 질문에 바르츠 박사는 ‘관찰자와 관찰대상을 분리할 수는 없지요(p.48).’라고 말하지만 리오는 ‘아니, 할 수 있어.(p.48)’라며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 이 소설의 주요한 사건들은 바로 이 바르츠 박사의 말에 대립하는 리오의 자만심에 기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찰자 리오가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관찰대상을 독립된 것이라고 믿는 순간 내면이 외부와 구분되지 않게 된다. 과잉된 내면이 그대로 현실로 보여지고, 오직 시간만이 변함없이 그의 주위를 흘러간다.
게임 - 시간의 틈
리오는 미미가 낳은 딸(이름이 ‘퍼디타’로 셰익스피어의 원작에서 같은 역할을 맡은 소녀와 이름이 같다)을 지노의 아이라고 생각해버리고 토니를 시켜 미국으로 떠나버린 지노에게로 보내려고 한다. 그러나 돈을 노리고 쫓아온 괴한에게 토니는 살해당하고, 퍼디타는 사건당시 현장에 있던 솁이 데려가서 키운다. 친아버지 리오는 영국에 계속 살고 있고, 어머니 미미는 프랑스 어딘가로 잠적하였는데, 퍼디타는 미국에서 새로운 부모가 된 솁과 살게 된 것이다. 세월이 흘러 퍼디타는 10대 후반의 소녀가 된다(205페이지에 ‘자동차를 타고 가도 거의 18년이나 걸리는 곳’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녀는 카센터에서 일하는 젤과 친구가 되는데, 노인이 된 솁의 일흔 살 생일파티에서 퍼디타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면서 점차 자신의 출생과 입양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된다. 중년의 지노가 나타나 솁과 카드게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퍼디타는 그가 젤의 아버지이기도 하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지노는 컴퓨터 게임 개발자다. 그가 만든 <시간의 틈>이란 고딕풍의 천사들이 나오는 게임(롤플레잉 게임으로 추측된다)에는 지노와 리오, 미미와 같은 실제 사람들이 자신만의 아바타를 통해 게임상에 플레이어로 등장한다. 오랜 세월동안 이들은 만나지 않았지만, 이 게임에 접속함으로써 일종의 만남과 상호작용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따라서 이 게임은 그들간의 '사이'(‘틈’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와 시공간의 '틈'을 연결하는 매개체로서의 기능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게임이 나타내는 세계관이나 시공간의 분위기가 특별히 세세한 상징적 의미를 띠고 있는지, 이 게임의 기원이 된 네르발의 꿈과 게임의 디테일한 요소가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는 단언하기 힘들다. 일단 틈을 연결하는 매개체로서의 기능을 가짐으로써 이 소설에서 중요한 상징이 되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게임이라는 가상세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관계가 무슨 의미가 있을지 회의하는 견해에 대해 이 소설에서 이미 그 대답을 마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바타, 클론, 대량생산, 복제, 3D 프린터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뭐가 진짠지 말할 수 있을 때가 되면 그때 가서 뭐가 가짠지 말하”(p.214, 이 구절은 시뮬라크르가 실재를 대체하는 현상에서 적극적 의미를 찾고 싶어한 장 보드리야르의 독백을 듣는 듯하다)라고 오톨리커스가 요구하는 것처럼. 현실과 가상이라는 문제는 사실 이 소설의 다른 중요한 맥락이기도 하다. 진짜 부모인 리오와 가상의 부모인 솁, 친부모이지만 아이를 버린 리오가 ‘진짜’ 부모일 수 있을지, 혹은 가상의 부모이지만 극진히 퍼디타를 사랑한 솁이 과연 ‘가짜’라고 할 수 있을지, 그리고 현실의 진실을 무시하고 가상의 외도에 집착해버린 리오의 내면 등의 요소가 소설에서 무척이나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화해와 회복
이 소설에서 오해로 인한 파국으로부터 사랑과 우정의 회복에 이르는 여정이 중심적인 서사인데, 그 여정의 핵심이 퍼디타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잃어버린’ 퍼디타를 다시 찾는 것이다(라틴어로 perdita에는 ‘lost(잃어버린)’이라는 뜻이 있다).
리오는 폴린의 권유대로 DNA검사를 받고 퍼디타가 과연 자신의 친딸인 것을 확인한다. 그러나 그는 99%의 가능성을 무시하고 자신은 1%의 예외에 해당할 것이라며 고집을 꺾지 않는다. 그러고서 그가 퍼디타를 지노에게 보내려 토니에게 지시한 것이다. 이성적인 판단력을 상실한 이런 행동으로 퍼디타는 말할 것도 없고 리오 자신과 미미, 지노까지도 심한 상처를 입게 된다. 분명 오해를 풀고 관계를 회복할 여지는 있었다. 그러나 리오에게는 그런 시도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는데, 그것은 리오의 왜곡된 내면이 외부와 구별되지 않는 상태가 되었고, 외부에 대해 지금까지 견지한 견해가 무너져 버린다면 그의 내면도 심각한 상처를 입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마음 한구석에는 자신의 불합리하고 잘못된 행동에 대한 인식이 있으면서도 그것을 억누르고 차갑게 행동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왜곡된 상태가 바로 펴지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이 아픔을 치유하는 연금술의 손으로 모든 이들을 어루만지는 것은 상당한 시간이 요구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퍼디타의 영아시절부터 10대 후반의 소녀가 되기까지 시간의 수평선에 가로놓인 ‘틈’이 필요했고, 그 틈 사이에 열려진 시간의 길이만큼 점차 마음의 상처와 왜곡은 치유되어 갔다. 사실, 퍼디타 자체가 일종의 ‘틈’이자, ‘매개체’이자 ‘화해와 회복’의 화신과도 같다. 그녀는 리오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흩어진 가족과 친구를 불러 모으고, 그들의 오해를 풀어주게 되는 계기이기 때문이다. 리오는 마침내 지노와 미미와 화해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결어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오해와 질투, 미움과 고집 부리기 등은 사실 우리 일상에 자주 있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그 정도가 심하든 약하든) 괴롭고 힘든 상황에 놓인다. 이런 의미에서 퍼디타와 그의 가족의 이야기는 우리 삶의 중요한 측면을 보여주고 있는 거울과도 같다. 우리가 얼마나 약하고 악한지, 얼마나 쉽게 무너지고 서로를 괴롭히는지를 자각하게 된다면 우리의 삶은 많이 달라질 수 있다. 우리가 이 소설에서 인생을 관통하는 깊은 진실을 엿볼 수 있음은 참으로 행운이다. 작은 것들이 얼마나 큰 힘으로 우리 삶을 옥죄는지를 알았다면 그 작은 것들을 잠시 놓아두고, 대신 작은 ‘틈’을 만드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