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먼저 눈을 사로잡았다. ‘한국이 싫어서’라는 어구가 작은 파문과도 같이 일렁이고 있었다. 더불어 에릭 쉬르데주의 책 ‘한국인은 미쳤다’가 눈에 어른거렸다. 마음에 요동을 일으킨 이 장강명의 제목이 에릭의 그것보다 새롭다거나 충격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한국인 다수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어구다. 우리 모두 몇 번쯤은 ‘한국이 싫다.’거나 ‘한국을 떠나고 싶다.’고 생각하거나 말해보았을 것이므로. 그러나 이런 말을 담으면 조금이나마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공사의 영역을 불문하고 찜찜한 뒷맛을 맛보게 된다. 공공연히 한국을 비판하는 것은 우리사회에서 금기시되어 왔고, 지금도 그 여진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금기의 옆에는 금기가 은폐하던 문제가 놓여있고, 우리가 한국인이라면 이 문제를 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동안 우리에게 강한 영향을 미친 것은 교육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십년이상 우리는 애국심과 도덕을 같은 카테고리로 배웠고, 윤리라는 것은 ‘국민윤리’의 테두리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던 것이다. 물론 애국심이 결코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애국심과 국가주의·신권위주의가 뒤섞인 관념들에 의해, 우리는 한국을 비판하는 것은 일종의 비도덕적 행위나 배은망덕한 행위로 여기도록 교육받았고, 은연중에 국가주의적 사고를 주입받았다. 그리고 한국이 얼마나 아름답고 뛰어나며 훌륭한 나라인지를 배우고 자부심을 느껴왔다. 이렇게 형성된 한국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의 이면에는 비판을 금압하는 사고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잘못된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면 그것 또한 잘못이 아닌가? 오히려 비판을 통해 더 좋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장강명의 시도는 ‘긍정적’인 것이다.
장강명은 <한국이 싫어서>에서 우리의 현 모습을 호주이민을 가는 ‘계나’를 통해 접근하고 우리에게 이 문제를 자신의 스타일로 설명해주고 있다. ‘계나’가 호주로 이민을 가려고 한 이유는 ‘한국이 싫어서’,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다.(p.10) 한국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다. 물론 호주가 곧 천국은 아니고, 그곳에서도 삶의 현장은 고난과 역경으로 가득하다. 계나는 웨이트리스로 일하며 편하지 않은 일상을 살아가야 했다. 그러다 조금 자리가 잡히고 시민권을 신청하기 조금 전, 옛날 남자친구인 지명의 전화를 받고 한국에 와서 그의 청혼을 어떻게 할지 고민한다. 그리고 다시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호주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계나는 다시 호주로 가는 이유를 생각한다.
'몇 년 전에 처음 호주로 갈 때에는 그 이유가 ‘한국이 싫어서’였는데, 이제는 아니야.(중략) 이제 내가 호주로 가는 건 한국이 싫어서가 아니라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야.' (p.161)
한국이 싫지는 않아도 한국에서 산다면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는 계나의 심경은 우리 대다수의 생각과 같은 것이 아닐까? 살아가며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은 행복해지는 것인데, 한국에서 점점 더 힘든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당연히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질 것이다. 작가는 계나의 입을 통해 호주로 가는 또다른 이유를 말한다.
‘사실 젊은 애들이 호주로 오려는 이유가 바로 그 사람대접 받으려고 그러는 거야. 접시를 닦으며 살아도 호주가 좋다 이거지. 사람대접을 받으니까.'(p.186)
어느 나라도 부조리와 사회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빈부격차나 소외계층의 문제 등은 어디에나 있다. 이는 전지구적 금융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경제정책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국민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자 국가가 지켜야 할 윤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국민이 인간답게 살 수 없는 국가는 존재의의를 상실한다. 자연권으로서의 인권은 국가의 가치적 근본질서이므로. 법철학자 루돌프 폰 예링의 말이 맴돈다. ‘권리를 위한 투쟁은 사회공동체의 의무다.’
기억하자. 그 '의무'는 궁극적으로는 한국에 대한 긍정과 애정에 기반한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