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을 읽기 전에 잠시 생각에 잠겼고, 읽고 난 후에도 역시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읽기 전에 눈에 보이는 것은 책의 제목과 ‘제20회 문학동네 작가상 수상작’이라는 문구였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라니, 도대체 무슨 내용이 담긴 것일까? 이 표제는 독특하고 지적인 감각을 자극했지만, 쉽게 내용을 추측하기는 어려웠다. 어찌보면 관념적인 내용이 엉키고 뭉쳐서 지적 자극을 유발하는 소설의 제목일 수도 있었고, 감성적 수사와 로맨스로 가득한 연애소설의 제목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기존에 출간된 장강명의 작품성향을 생각해 본다면 그럴 가능성은 없었고, 이 작품 역시 독자들에게 가깝게 다가와서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눈을 고정시키게 만들고, 종국에는 독자의 가슴 속에 둔중하고 오래 울리는 파동을 남길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다 읽고 난 지금 나는 이 추측이 맞았으며, 문학동네 작가상을 수상했다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 소설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사건들이 연속적인 시간의 진행방향대로 배열되지 않고, 무작위적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시간상 후에 일어난 일이 먼저 나오고, 뒤에 나오는 과거의 사실을 다시금 배치해서 이해하여야 하는 경우가 많다. 소설 내용 중에 나오는 남자의 원고 <우주 알 이야기>도 마찬가지의 구조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p.18을 참고하라). 그러나 이런 시도는 단지 특수한 실험성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시간상의 무작위적 배열도 작가가 의도적으로 정밀하게 무작위처럼 보이도록 한 것일 수 있다. 작품을 읽어보면 작가가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효율적인 형태로 서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험적 형식에 과도하게 집착하기보다 이 소설 자체의 내용에 더 관심을 쏟는 것이 올바른 접근일 것이다.
이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은 한 젊은 남자로서(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고등학생 시절에 자신을 괴롭힌 학생(이영훈)을 살해하고 교도소에 수감된 전력이 있다. 교도소와 정신병원을 거쳐 석방된 지금, 이 남자는 <우주 알 이야기>라는 소설의 원고를 써서 청소년 문학상 공모에 응모한다. 출판사에는 남자와 학교 동창인 여자가 일하고 있었다. 여자(보람)는 이 소설을 읽고 응모한 사람이 학창시절 알던 그 남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를 다시 만난다.
남자가 살해한 영훈의 어머니는 사건 발생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계속 남자를 따라다니며 밥을 사주거나, 영훈의 유골함 앞에서 남자와 함께 아들을 추모하기도 하고, 때로는 남자의 일을 방해하기도 한다. 그녀의 전 존재가 영훈의 사망에 고착되어버린 것이다. 그녀는 아들인 영훈이 일진이었거나 남자를 괴롭혔다는 사실도 인정하기를 거부하며, 가해자인 남자가 피해자인 것처럼 세상에 알려지는 것도 용납하려하지 않는다. 남자는 이런 영훈의 어머니를 위해 기꺼이 그녀의 요구에 따른다. 그러다 영훈 어머니는 결국엔 남자를 칼로 찔러 살해하기에 이른다.
등장인물인 남자와 여자, 그리고 영훈의 어머니, 이 세 사람이 걸어간 존재의 궤적이 이 소설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 동시에, 이 궤적은 그들이 나름대로 세계를 인식한 방식과 구조를 반영하고 있고, 소설의 주제의식과도 맞닿아 있다. 이는 소설 속 살인사건에 관한 단순한 도덕적 판단의 문제나 사회적 문제의 인식을 넘어선 영역, 즉 어떤 패턴과 근본적인 존재의 문제에 대한 것이리라. 그리고 존재와 죽음에 대해 천착한 철학자 하이데거가 잘 설명하는 것처럼, 그들은 죽음 앞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에 도달할 기회를 얻는다.
우리가 스스로의 삶에 대해, 우리가 살던 세상에 대해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 진정 우리는 누구인지, 남자의 시신은 우리 앞에 누워서 계속 묻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너는 누구였어?
너는 도대체 누구였어?
너는 누구였어, 도대체? (p.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