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우엘벡의 「복종」: 계속되는 물음>
(0)“복종에 대한 책이죠.” (「복종」, 제5부 중에서, p.317)
(1)미셸 우엘벡의 소설 <복종>은 문제적 작품이다. 이 작품이 출간되기 전날에 발생한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 때문에 이 책이 더욱 주목을 받게 되고, 뜻하지 않았던 ‘문제적’ 효과를 얻기도 했지만, 책의 내용 자체가 던지는 물음은 테러사건이 던지는 파장보다 더 오래 독자의 가슴에 남으리라고 생각한다. 오랜 기독교 문명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유럽의 대표적 선진국인 프랑스, 문화와 예술의 나라이자 수많은 석학을 배출한 지성의 나라 프랑스에서, 프랑스적인 것과는 너무도 이질적인 이슬람 정권이 정상적 선거를 통해 출현하게 된다는 설정이 무척 독창적이면서도 충격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슬람이 프랑스를 장악한다는 사실은 정체가 모호한 불안감을 수반한다. 서구가 이슬람 세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다소 편견에 가까운 이미지들이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뉴스에서는 ‘하마스의 반대 분파가 새로운 행동을 개시하기로 결정했고, 거의 매일 폭탄을 두른 자살 테러범들이 식당이며 버스로 뛰어들었다.’ (「복종」, p.200) ‘호전적이고 폭력적인 이슬람’에 대한 이미지들은 지구 반대편 우리나라의 시청자들에게도 비슷한 불안감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우리의 경우를 잠시 생각해보자. 세계화와 지구촌의 시대에 무색하게도 이슬람교 자체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는 깊어지지 않고, 한국어나 영어로 번역된 코란을 읽어본 이도 드물다. 많은 이들이 이슬람교는 ‘알라신’을 숭배하는 종교인 것으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알라’라는 말은 신의 이름이 아니라 그냥 ‘신’이라는 뜻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프랑스의 경우도 이런 점에서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프랑스는 우리와 다소 다른 상황에 있으며, 이점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지리적으로 우리보다 중동에 가까운 프랑스에는 수많은 이슬람 이민자들이 거주하고 있고, 이들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정치인이나 관료들은 이들을 정치적인 측면에서나 정책적인 면에서 고려해야만 한다. 이슬람은 프랑스에서 살아있는 현안이자 변화하는 시대의 증인들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슬람을 호전적인 이미지로만 생각하는 것은 ‘무해한 내면의 편견’일 수 없다. 이슬람은 ‘이해되어야 할 과제’의 지위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슬람화된 프랑스를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요소는 가치적인 면과 체제적인 면으로 집약된다. 이 두 가지 차원에서 소설에 나오는 이슬람 정권의 기획이 정리될 수 있다.)
(2) 정신적 가치라는 것은-그리하여 이슬람이라는 ‘가치’ 역시-언급할 때 평가를 수반하거나 평가가 선행되는 개념이다. 그런데, 제대로 이슬람을 이해해야 우리의 과제로서의 이슬람을 다룰 수도 있다. 즉, 이슬람에 대한 가치판단 이전에 가치판단의 대상이 되는 요소들에 대한 가감 없는 파악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소설에서 주목하는 ‘이슬람화’는 단순히 종교적 제의의 대상을 기독교와 교체하거나(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가 상정하는 유일신이 동일한 신인지에 대한 논의도 없는 것은 아니다.) 의복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보다 훨씬 깊은 의미의 변화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이슬람이라는 문제는 단순한 종교적인 숭배의 대상이 변화하는 차원의 것이라기보다, 또 다른 세계관이자 사고의 변화를 수반하는 ‘방법적 전환’이란 점에 핵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우엘벡이 그려내는 프랑스 이슬람의 모습에는 그런 방법으로서의 이슬람의 면면이 잘 포착되어 있다.
사고의 방법의 변화는 개개의 사고가 변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관련된 체계의 총괄적인 변화를 수반하게 되는데, 이로서 전통적인 가치를 가진 프랑스 사람들에게 불안을 야기하게 된다. 정신적 변화는 보이지 않기에 더욱 두려운 법 아니던가?
이런 가치와 방법으로서의 이슬람이 처음 맞이하는 도전과 응전의 장은 정치무대이다. 이 소설에서 그려진 이슬람 정당이 프랑스의 정권을 잡는 과정은 무척이나 핍진한데, 서구의 대의 민주주의적 과정을 통해 이슬람이 정치의 영역에서 성공했다는 것이 무척이나 의미심장하다. 이는 이슬람이 서구의 체제에 완전히 적응하고 과거 이슬람의 이베리아 지배와 같은 성과를 골 족의 나라에서 이루어 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슬람은 게르만과 앵글로 색슨을 다음 대상으로 삼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소설에서 실제로 모하메드 벤 아메스 대통령은 유럽전역과 터키, 북아프리카를 포함한 ‘새로운 로마’를 꿈꾼다. 이런 언명은 프랑스의 독자들에게 소설의 차원을 넘어 현실적인 가능성으로서 다가오는 것일 수 있다.
이런 ‘체제적 이슬람화’가 유럽연합을 좌지우지할 가능성으로까지 거론되는 것은 오일달러로 대표되는 자본의 도움 덕분이기도 하다. 이슬람은 현대의 자본주의-특히 금융 분야의 지배적 지위가 만연한 전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와도 아무런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서구적 자유민주주의체제와의 부정합적인 면도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지만, 현대 이슬람의 유연한 모습은 서구의 민주주의적 관용의 정신과 훌륭히 조화할 수 있다. 이 소설의 핍진함이 일부 사람들에게 생생한 현실의 공포를 야기하는 것은 이런 서술의 타당성에 기인한다. 사실, 가치와 방법으로서의 이슬람, 현대 체제에 완전히 적응한 이슬람이라는 것은 이미 어느 정도 현실에 실재하는 공포이다. 이런 추세라면 또 다른 벤 아메스가 미래에 다른 이름으로 등장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3) 우리가 거대한 체계를 고찰할 때, 문화, 정치경제적 체제와 같은 거시적 영역을 넘어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것은 개개인의 내적 차원에서의 의미이다. 소설 속에서 이슬람은 분명 성공했다. 그러나 그 현실적 성공의 가능성의 이면에는 타자의 불안감과 좌절의 이슬이 맺혀있다. 그렇기에 그 물기가 말라가고 속이 타는 불안한 내적 과정에 직면한 개개인에게는 실존적 물음이 또다시 제기될 것이다. 즉, 이슬람화의 문제는 정치적 차원의 문제를 넘어 개개인에게 실존적 과제를 부여하는 ‘삶의 문제’이자 ‘내면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 문제를 고민하는 실존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나’, 프랑수아다.
우엘벡적 주체인 프랑수아가 걸어가는 궤적은-이른바 ‘노선’을 굳이 따져보자면-지식인이지만 현실에 비판적인 좌파이기보다는 쁘띠 부르주아의 퇴폐적인 모습에 가깝고, 그는 정치에 환멸을 느끼며 조금씩 몰락하는 궤도에서 오래도록 벗어나지 못한다. 그가 맺는 성적 관계에는 진지한 사랑이나 결혼에 대한 고려가 선행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가 결코 성적인 방탕함을 추구하거나 퀴레네적 쾌락주의자인 것도 아니다. 그저 일상의 모든 것이 환멸의 냄새를 풍긴다.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한 다음날 ‘엄청난 무언가, 결코 되찾지 못할 무언가를 잃어 버렸다.’(p.15) 그렇기에 그 몰락의 과정은 계속 이어진다. 그러나 프랑수아가 박사학위를 위해 연구한 주제인 위스망스라는 작가가 추구한 세계는 프랑수아의 내적 상태에 따라 다양한 측면에서 검토되고, 위스망스의 삶의 면면과 작품들은 프랑수아의 그것들과 단속적으로 비교된다. 위스망스가 프랑수아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라고 하긴 어렵다. 그러나 그는 프랑수아의 좋은 친구, 어쩌면 현실에서 사망했고 서로 만난 적도 없음에도 프랑수아에게 진정한, 그리고 아마도 거의 유일한 친구라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수아의 삶의 과정들마다 떠오르고 무언의 메시지를 던지는 친구 말이다. 마침내, 프랑수아는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마침내 이슬람으로 개종을 하고 젊은 여성과 결혼하게 되는데(무척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이마저도 위스망스가 가톨릭으로 개종을 한 모습과 대비된다. (프랑수아는 위스망스의 개종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지만.)
이슬람화된 프랑스에서 ‘나’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기존의 현실에 환멸을 느낀 지식인 ‘나’의 고민, 그리고 ‘나’ 실존적 자각과 실천이라는 메시지가 이 지점에서 부상한다. 위스망스를 통해서 프랑수아는 자신의 실존적 의미에 대한 깊은 인식에 이를 수 있었다. 그 인식을 집약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위스망스의 플레이아드 총서 서문인 것이다. 서문에서 말하는 소박한 행복, 소시민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삶에서 느끼는 소소한 즐거움들. 이것이 위스망스가 진정으로 원하던 것이자, 위스망스에 대해 프랑수아가 도달한 이해의 완성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복종」의 결론은 아니다. 오히려 플레이아드 총서의 서문은 또 다른 하나의 문제제기에 해당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에서 ‘나’가 살아가는 것의 문제를 작품이 최후로 제시하고, 열린 지평을 말미에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4) ‘복종’이란 것은 권위자 내지 절대자에 대한 충성과 동의어가 아니다. ‘이슬람은 세상을 받아들입니다. 온전히, 그 자체로서요.’(p.317) 세상을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고 긍정한다면, 세상을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곧 복종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이해한다 해도, 신의 법이라는 것을 말하고 이해하며 실행하는데, 인간의 요소가 들어갈 수밖에 없으므로 이 ‘복종의 미학’은 불가피하게 왜곡되고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 ‘복종’의 관념이 새겨온 역사에는 위대함과 찬란함도 있지만 고통과 핏방울의 얼룩이 배어 있기도 하다.
이슬람이라는 것을 이런 정신적 과정으로 바라보는 것, 그리고 현대에 등장할 수 있는 정치적 실재로서의 모습들, 이에 대해 우엘벡이 말하고 있는 것은 앞으로 계속 답해져야 할 질문이지 그 답변이 아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우리의 내면을 뒤흔들 만큼 충분히 의미심장하다. 그렇기에 우린 앞으로도 우엘벡과 함께 고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