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리뷰
- 아픔과 슬픔에 찬 삶을 따뜻하게 응시하기
저녁
해가 지고 있다. 석양이 하늘을 물들이고 점차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하루를 정리하고 다음을 준비해야 할 시기인 저녁이다. 글에도 저녁이 있다면, 지금까지 지난 시간을 정리하고 조금씩 마무리할 준비를 하는 상태가 있다면, 손홍규의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이 바로 그러한 책이라 할 것이다.
책의 제목이 가진 뜻은 첫머리에 실린 저자의 말에서 가늠해 볼 수 있다. 딸아이와 저녁에 산책을 나선 저자의 생각이다.
아빠는......신념이 있고 이걸 가장 위태롭게 하는 건......불행하게도 나 자신이므로 내 신념을 내게서 지켜내고 구해내기 위해......신념을 포기해야 한다. 아니 더 적절하게는 이 신념을 보호하고 실현할 수 있는 이들에게 기꺼이 넘겨줘야 한다.(p.5)
작가는 마음을 다친 채 딸과 저녁 산책에서 돌아와야 했다. 신념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신념을 포기해야 하는 역설. '양심의 운명'이라는 것은 이러한 역설 속에 놓여있다는 자각과 성찰이 이 책의 전면을 둘러싸고 있는 생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작가는 저녁에 놓였다. 지금까지 온 날들을 돌아보고 조금씩 정리하며 미래를 전망해 본다. 마음을 다친 채로 그렇게 한다. 하지만 붉게 물든 저녁 하늘이 저자의 벗이 되어 마음을 이해해 준다.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에 함께 나도 저자와, 저녁과 함께 마음 아파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
작가로서의 성장
작가는 어린 시절 집에서 키웠던 소가 출산을 하는 과정을 회상하는 글로 첫머리를 연다. 소가 출산하기까지의 신비로운 과정, 그리고 소를 떠나보내기까지의 일과 그 시절 사람들의 삶의 애환에 대한 관찰은 작가를 문학의 길로 인도하게 된 것 같다. 작가는 그 시절의 경험을 통해 자신있게 ‘문학은 소다’(p.22)고 말한다. 투박하면서도 비장하고, 희극적인 면을 결코 뺄 수 없는 삶 그 자체와도 같은 소, 그리고 그와 같은 문학의 길을 사랑하며 그는 고이 걸어온 것이다.
소설가의 꿈을 품고 대학에 들어간 후, 작가는 갑작스럽게 고모의 부음을 받는다. 고모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었다. 젊은 문학도는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장례과정을 바라보며 중첩시키고, 이국의 소설과 고모의 기억은 서로 대화를 나눈다.(p.26~37) 그가 본 것은 고모와 그 가족들을 통해 투영된 이 땅과 사람들의 역사였다. 젊은 작가 지망생은 이렇게 조금씩 진짜 작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이제 작가의 부모가 칠순이 된 노인이 되었고(p.63), 이제 스스로 부모가 된 저자는 삶이란 것을 비로소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고 느낀다. 할머니와 넛할아버지의 고독과 우수(p.55), 과묵했던 작은 할아버지의 본심(p.58), 차갑게 보였던 어머니의 모습이 실은 완전한 오해라는 사실(p.67), 아버지의 절망(p.75)까지도 모두 나이가 차기 전에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다. 이제 부모가 되고 40을 훌쩍 넘긴 나이가 된 저자는 지금 소설가임에도 ‘여전히 내 꿈은 소설가다’(p.79)고 말한다. 그것은 소설이 삶을 제대로 이해하는 과정이었기에, 삶을 이해함과 아울러 다시 소설가가 되기를 바란다는 의미로 보인다. ‘인간은 다시 신비로워져야 하’(p.91)는 것이다.
작가가 되어
이후 작가가 된 저자는 터키 여행을 떠난 체험을 기록하는데, 특히 소설가 야샤르 케말과 만나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눈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문학은 바로 네가 선 그 자리에서 시작하는 거다’(p.118), ‘결코 자본주의에 굴복하지 말라’(p.127). 아흔 살 가까운 노인인 야샤르 케말의 열정적인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이후 우연히 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저자는 더욱 문학적으로 성장한 후였다.
과거 비참했던 한국의 밤들을 떠올리며 출세주의자들, 권력에 영합한 자들을 떠올리고 ‘문학은 그렇게 하지 않는 거다’(p.143)라고 말한다. 그는 소설가로서의 운명을 절감하고 삶에서 은퇴할 때 소설가로서도 은퇴하게 될 것임을 역설적으로 ‘나는 은퇴하기 위해 소설가가 되었다.’(p.147)라고 한다. 소설가로서 그 길은 살아남은 자로서 인간이 되기 위한(p.159변형) 길이다. 그러나 필멸하는 인간의 삶은 불멸의 의미가 부여될 수 있다(p.166). 소설가로서 그의 체험과 사색이 인간 일반의 문제로까지 고양되어 있음은, 이 책이 살아남은 인간 모두를 위한 것, 인간이 되기 위한 모든 이들과 함께 사색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삶이 된 산문, 산문이 된 삶
작가가 세상을 보는 눈에는 슬픔과 고통에 대한 공감과 연민이 가득하다.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이 겪는 것이 슬픔과 고통이며, 아직도 우리에겐 기쁨과 즐거움보다 슬픈 일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리라. 부유한 사람이라고 해서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주로 평범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바라다본다. 그렇기에 그들과 함께 슬퍼하고 나지막하게 운다.
‘가난한 이가 가장 섦게 운다’(p.219)는 말을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난한 삶을 겪어보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난한 이의 심정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소설가로서 환멸이라는 것을 느끼기도 하지만 ‘문학이란 문학에 환멸을 느낀 자가 가까스로 참고 견디며 하는 일’(p.175)임을 깨닫는 것도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이 언제나 있을 것임을 깨닫기 때문이었다.
삶의 편린이 진실하게 녹아든 글들은 슬프고 고독한 인간의 정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작가는 개인적인 삶과 내면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것은 한 인생이자, 문학의 여정이기도 했다. 인간의 진실한 모습이자 문학가로서 진지한 탐구의 과정이기도 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왜 작가가 저녁에 이르러 마음을 다쳐야만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이전보다 인생의 해가 상당히 기운 시기, 작가는 앞을 바라다보며 삶은 앞으로도 같은 슬픔과 아픔이 있을 것을, 그리고 그것을 한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념을 포기한다는 첫머리의 말은 사실 작가로서 더욱 치열하게 살아가겠다는 다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더욱 치열하게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촉구하는 것이다.
‘말의 결함은……살아온 삶의 결함’(p.46)일 수밖에 없다는 구절은 나로 하여금 나의 글의 결함과 삶의 결함들을 되돌아 보게 했다. 작가가 글을 쓰고 살며 얼마나 자신의 결함에 직면하고 괴로워했을지 실감이 갔다.
그러나 작가는 계속 써야 한다. 그가 말하는 것은 결국 삶이며, 작가에게는 삶 자체가 문학이 된다. 그것은 우수에 찬 어머니의 얼굴(p.48)이며, 고모의 광대뼈(p.23)이다. 이 책은 그 다정하고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 것들이 오롯이 모여 산문이 된 것이다. 사람은 나이를 먹어가는 존재가 아니라 사연을 쌓아가는 존재(p.89)라는 말 그대로 작가의 사연이 쌓여 삶이 되고 피멍든 문장이 되고, 슬픔이 자욱한 비내리는 광장이 된다.
책을 읽다 저녁해가 질 시간이 다가올 때마다 기억하겠지. 우리의 삶도, 세상도 아주 조금씩 저물어 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의 글과 삶도 사연이 되어 나의 뼈속에 아로새겨짐을. 그것이 슬픔과 아픔이라 해도 아름답게 살아나가야 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