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사람은 듣고 싶은 소리만 듣는다더니, 아니 강대국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책만 펼친다고 해야 할까?
'팔레스타인, 가자', 여전히 고통 받고 있는 땅. 이토록 집요하게 괴롭힐 수 있을까? 괴롭힘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절멸을 노리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는데... 자신들도 '디아스포라'를 겪었으면서, 그런 이산의 고통을 겪었으면서도 팔레스타인에서 박해자로, 이산을 강제하는 존재로 군림하는 이스라엘을 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상대는 테러범이기 때문에 처단해야 한다고, 가자에 있는 민간 시설을 폭격하고, 자신들에게 저항한다는 이유로 표적 살인을 저지르는 그들에게, 세계는 침묵하고 있다.
비판을 하는 나라도 있겠지. 그런데 잠시 뿐이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가자를 폭격한다. 봉쇄한다. 자신의 땅에서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하는 사람들. 가족들끼리도 왕래하기 힘든 사람들. 가자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비극, 우리나라에도 이젠 제법 그들의 작품이 번역되어 있다. 우리 곁에 팔레스타인 문학이 다가오고 있는 것.
이 소설집, 가산 카나파니의 소설에 나오는 내용,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그렇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라는 작품의 마지막 장면.
"왜 당신들은 물탱크의 측면을 노크하지 않았지? 왜 물탱크의 옆구리를 쾅쾅 치지 않았던 거야? 왜? 왜? 왜?"(124쪽)
쿠웨이트로 밀입국을 하기 위해 트럭 물탱크에 들어간 세 사람. 지금 우리나라도 푹푹 찌는 날씨인데, 사막에서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밀폐된 물탱크. 그야말로 비유적 의미로 찜통이 아니라 사실적 의미로 찜통이었을 것이다.
밀입국을 시켜주는 브로커도 그 점을 알고 있다. 그 역시 팔레스타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성불능이 된 사람. 하여 그는 7분만 참으라고 한다. 그 정도면 죽지는 않을 거라고. 두 번의 검문.
한 번은 7분만에 통과한다. 찜통 속 사람들은 기진맥진한다. 밀입국. 살기 위해서 다른 나라로 가는 것. 지구에는 국경이 없지만 나라끼리는 임의적으로 국경을 만들어낸다. 자유롭게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갈 수가 없다. 특히 약한 나라 없는 사람들은 더더욱.
그러니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이런 방법밖에 없다. 그동안 브로커들에게 사기를 당하기도 했을 테고... 이들을 물탱크(물은 없다. 그러니 그 물통 안이 얼마나 덥고 산소가 없을지는 상상할 수 있다)에 들어가라고 하는 '아불 카이주란'을 미심쩍어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게다가 첫 번째는 성공했지 않은가.
두 번째 관문. 변수가 생긴다. 이리저리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관리가 나온다. 시간은 흘러간다. 아불 카이주란은 초조해진다. 빨리 해결하려 하지만 뜻대로 안 된다. 7분이 지나고 또 지나고, 또 7분이 지난다.
이들이 견딜 수 있는 시간의 세 배가 흘러간다. 황급히 차를 몰고 물탱크를 열어보는 카이주란. 아, 결국 그들은 살아남지 못한다. 살기 위해서 밀입국을 하려 했으나 그들은 죽어서 밀입국을 하게 된다. 이런 밀입국자들, 뉴스에서 많이 보아왔다.
세계는 가자뿐이 아니라 도처에서 이런 비극이 발생하고 있다. 그런데도 세계는 침묵하고 있다. 충분히 함께 살 수 있는 나라들임에도, 자신들의 몫에서 조금만 떼어도 되는데, 안 한다. 모르쇠로 일관한다.
오히려 그들이 밀입국을 하려고 하면 기를 쓰고 막는다. 어쩌다 성공한 사람이 있어도 다시 추방하기도 한다. 그러니 밀입국을 하려는 사람들, 목숨을 걸 수밖에 없다. 또한 밀입국을 하지 않고 자리를 잡고 사는 사람이라도 카이주란처럼 불임의 존재가 된다.
그들은 세대를 영속시킬 수 없다. 강제로 세대를 단절당했음을 이 카이주란이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이 소설집 첫소설은 가자의 비극을 밀입국을 하려는 세 사람과 이들을 밀입국시키려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보여준다. (여기서 브로커 역할을 하는 카이주란은 동포애보다는 돈이 더 목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그에게도 팔레스타인 사람이라는 동포애는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소설에서는 왜 쾅쾅 치지 않았느냐고 절규하지만, 아니다. 이들은 쾅쾅 치고,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다. 그런 소리들이 밖으로 나가지 않게 방음벽을 치고, 귀를 닫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다.
오랜 시간 방음벽을 치고, 귀를 닫고 있었기에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다. 반복되고 있는데도 여전히 귀를 닫고 있다. 그들은 계속 소리치고 있는데도. 하여 소설의 결말을 다시 읽어야 한다.
"왜 그들이 그렇게 외치고, 쾅 쾅 치고 있는데도, 할 수 있는 사람들, 할 수 있는 나라들은 듣지 않고 침묵하고 있는가? 왜 대답하지 않는가? 왜 이토록 오래 모른 체하고 있는가?"라고.
첫소설말고도 가자의 비극을 보여주는 소설로는 '슬픈 오렌지의 땅, 움 사아드, 가자에서 온 편지'가 있다.
'가자에서 온 편지'에서 주인공은 미국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자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마치 작가의 인생을 보여주는 듯한 구절인데.
"나는 이곳에 머물면서 결코 떠나지 않을 거야.(210쪽) ...... 내 친구여, 돌아오게나! 우리 모두는 자네를 기다리고 있다네.(219쪽)"
이때 자네는 새로운 삶을 위해 떠난 팔레스타인 사람들만이 아니다. 팔레스타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사람들이다. 그렇다. 이들은 결코 소리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소리치고 있다. 그 소리를 단지 우리가 듣지 않고 있었을 뿐.
이제는 세계가 그러한 외침에 응답해야 한다. 그래, 우리 그 소리 들었다고. 당신들의 닫힌 문 열어주겠다고.
최근에 읽은 [팔레스타인 번역가의 이중생활]만큼 울림을 주는 소설이다. 아마 그 책을 읽고 이 소설을 읽으면 더 마음에 다가올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