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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담서림(道談書林)
  • 남극
  • 클레어 키건
  • 16,200원 (10%900)
  • 2025-12-17
  • : 19,596

살아가면서 보고 싶어하지 않는,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 장면이 있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장면도 있고. 또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장면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삶들을 보지 않는다고 해서 삶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은 너무도 다양하기에, 좋다고 여기는 삶도, 좋지 않다고 여기는 삶도 우리 주변에 있다. 우리가 좋지 않은 삶이라고 하는 것들을 보지 않으려 애쓰고는 있지만, 보지 않으려 한다고 해서 그런 삶들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삶들 속에서 자기 삶의 방향을 찾아가야 한다. 길을 잃지 않도록... 어쩌면 우리가 소설을 읽는 것은 삶의 방향을 잃지 않도록 하는 면역 주사를 맞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 


책이라는 공간에서 실제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경험하면서 자기 삶의 방향을 찾아나가는, 좋지 않다고 여기는 삶에 대한 면역을 형성하는... 그러한 백신.


문학의 효용성을 따지기 전에 문학 작품은 그렇게 재미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다가오기도 하지만,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어떠한 면역을 형성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작가들이 삶의 다양한 면을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기도 할 것이고.


클레어 키건의 초기 단편집이다. 작품 활동을 시작했을 때 출간한 작품들이라고 하는데... 첫 작품인 '남극'을 읽으면서 어, 이 작품 어디서 읽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읽었더라? 분명 클레어 키건의 작품인데... 찾아보니 [너무 늦은 시간]이라는 책에 수록되어 있다. 그래, 읽었네... 읽었어. 그런데 왜 이 작품이 같은 출판사에서 또 같은 번역자에 의해서 같은 년도에 다른 책에 각자 실려 출간되었지? 하는 의문.


단편집들이 가끔은 같은 작품을 수록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같은 해에 나오다니.. 참. 그것을 밝혀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지만...


이 첫 작품인 [남극]이 클레어 키건의 초기 작품들의 성향을 너무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평범하다고 여기는 삶 너머에 있는 삶들을 보여주는 작품들.


'남극'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시작부터가 일상, 평범, 보통을 넘어서는 삶의 다른 단면을 추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던 여자는 집을 떠날 때마다 다른 남자와 자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 그래서 다음 주말에 그 답을 알아내기로 결심했다.'(10쪽)


분명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던'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결혼 생활에 그다지 불만이 없었다는 얘기다. 남편과의 관계도, 아이들과의 관계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삶만을 지속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일상에서 벗어난 삶이 여기서 시작된다. 다른 삶에의 궁금증.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대한 호기심. 그것으로 인해 비극이든 희극이든 또 일상으로 돌아오든 돌아오지 않든, 우리 삶에서는 여러 변수가 발생한다. 그리고 그 변수에 따라서 삶의 방향이 달라지기도 한다.


'남극'... 보통 사람들은 가지 못하는 곳이다. 일상에서 벗어난 장소가 바로 남극이다.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떠나야 하는 곳. 일상에서 겪는 보통의 삶에서 벗어나려 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남극을 탐험하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남극을 가볼 수 있는 경우가 희박하듯이 이 소설 속 주인공처럼 행동하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그렇다고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는 그러한 행위이기도 하고.


이런 일상에서 보기 드문 행위들이 이 소설집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그럼에도 많은 소설들에서는 가부장적인 사회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어서, 클레어 키건은 소설을 통해서 여전히 이 세상은 한쪽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작품을 통해서 드러내고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알려졌을 때 우리를 경악에 빠뜨리는 가부장적 폭력이 사실은 삶에서 빈번히 일어나고 있음을 이 소설집의 많은 작품들에서 보여주고 있는데, 그럼에도 그것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가령 '노래하는 계산원'이라는 소설에서는 둘만 남겨진 자매의 이야기인데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 둘 다 굳이 못을 다시 박지 않았다. 우리 삶에 저 나쁜 놈을 다시 걸어두려 하지 않았다.'(135쪽)


벽에서 떨어진 액자. 그 속에 들어 있던 사진. 그 사진의 주인공은 바로 그들의 아빠다. 그런데 아빠를 '저 나쁜 놈'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가부장의 폭력이 있었다는 얘기가 되고, 이것을 이겨내는 자매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남자에게 종속되는 여자의 삶을 거부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이는 클레어 키건의 다른 소설들에서도 보여진다. 그렇게 우리가 감추려고 하는 삶들을 클레어 키건은 앞으로 끌어온다. 부정하지 말라고. 안 보려 한다고 그런 삶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삶은 눈속임이 아니라고. 무슨 마술처럼 있던 것을 없던 것으로,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마냥 부정적이지만은 않은, 자신을 옥죄는 삶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려는 모습. 주체성을 지닌 인간으로 다시 서는 모습을 이 소설집에 실린 다른 소설들을 통해서도 볼 수 있는데... 


'남자애한테는 이상한 이름'이라는 소설에서 '나는 너에게 위안을 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남자를 아이처럼 보살피는 여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여자는 내 세대에서 끝이다.' (168쪽)는 표현이나 '어디 한번 타봐'라는 소설에서 '세상에. 드디어, 10년 만에, 그녀는 원하는 것을 가질 참이다. 살아 있는 기분을 다시 느끼게 해줄 사람, 이 옷 속에 누군가가 존재한다고 느끼게 해줄 사람을 말이다. 로슬린은 이제 아닌 척하면서 집에서 얌전히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194쪽)는 표현처럼, 가부장의 세계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의 모습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이렇듯 삶에서 겪고 싶지 않은 일들도 역시 우리들 삶에 함께 존재한다고. 이것을 제대로 보아야 한다고 클레어 키건은 작품을 통해서 말하는 듯하다. 그래서 클레어 키건의 이 소설을 읽으면 백신 주사를 맞은 듯한 느낌이 든다. 삶의 부정적인 모습을 어느 정도는 경험한 듯한 그런 느낌....


다른 소설들처럼 술술 읽히게 간결한 문장으로 담담하게 사건을 전개하고 있지만, 그 짧은 소설 속에서도 여러 생각을 하게 하는 그런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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