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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담서림(道談書林)

  '이곳에서는 깨진 것들을 사랑의 얼굴이라고 부른다'('불사조' 중에서. 16-17쪽)


  이 구절이 충격이었다. 깨진 것들이 사랑의 얼굴이라니... 그러다 생각해 보니 사랑은 깨짐 아니던가. 


  자신이 지니고 있던 것들이 깨졌을 때 비로소 상대에게 나 자신을 줄 수 있는 것. 그것이 사랑이지 않을까.


  이렇게 깨지기 위해서는 자신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자신을 버려야 한다. 이 버림이 이루어지면 자신은 작아질 수 있다. 깨짐이 무엇인가? 점점 작아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점점 작아지면 컸을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그래서 작은 것들도 사랑하게 된다. 


수많은 작은 것들이 주변에 있었음을 알게 되고, 그것을 사랑하게 되고, 그러면서 또 깨지고 깨지고, 깨지지만 죽지는 않는다. 이 시 제목인 불사조처럼.


불사조는 죽음에서 태어난 존재 아닌가. 그러니 불사조는 깨짐으로서 자신으로 다시 태어난 존재다. 이 불사조와 연결되는 것이 '시인하다'라는 시다.


시인 역시 수많은 깨짐, 죽음을 거치고서 시에 자신을 불어넣은 존재라는 생각을 하는데... 그냥 한글로 '시인하다'라고만 되어 있어 무슨 뜻인지 고민해야 하지만, 읽어보면 시를 쓰는 시인이 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시인하다


스무 살의 나는 하루에도 아홉 번씩 죽었다

서른 살의 나는 이따금 생각나면 죽었다

마흔 살의 나는 웬만해선 죽지 않는다


죽는 법을 자꾸 잊는다

무덤 속에서도 자꾸 살아난다

사는 일이 큰 이득이라는 듯,


살고

살아나면

살아버린다


서른과 마흔,

사이에 

산문이 있었다


그걸 쓰느라 죽을 시간이 없었다!


박연준, 사랑이 죽었는지 가서 보고 오렴. 문학동네. 2024년 1판 5쇄. 125쪽.


이래서 시인은 불사조다. 시만 쓰지 않는다. 산문도 쓴다. 쓴다는 행위로 살아간다. 쓰기 위해서 죽어야 한다. 열정으로 넘치던 20대에는 여러 번 죽을 수 있다. 그만큼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이들어 가면서 죽음의 횟수는 줄어든다. 다른 말로 하면 열정이 그만큼 줄어든다고 할 수 있다. 열정이 줄어들었을 때 시는 멀어지기도 한다. 열정이 자신을 꽉 채웠을 때 시가 다가온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한데...


따라서 시인은 이때 산문을 쓴다. 쓰기를 버릴 수 없으므로, 더 깨지기 위해서 산문을 쓴다. 그래서 죽을 시간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면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하나? 시를 써야 한다. 살았으니까. 죽음에서 살아왔으니, 시를 써야 한다.


그러니 시집 제목이 된 '사랑이 죽었는지 가서 보고 오렴' 했더니, 아직 죽지 않았다고 한다. 이 구절이 바로 '불사조'란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불사조는 바로 시인이다. 이렇게 시인은 깨지고 깨지고 죽음에서 다시 태어나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 깨져서 작아졌기에 더욱 작은 것들을 볼 수 있는 사람. 죽음도 볼 수 있는 사람. 그러기에 '시인하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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