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이시봉이라는 이름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소설을 읽기 전에 또 이 책의 광고를 보고는 이시봉이라는 사람의 생애를 다룬 소설이겠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사람이 아니라 개다.
그럼 주인공이 '개'겠네. 개의 일생을 다룬 소설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개를 둘러싼 사람들의 삶이다. 스페인, 프랑스, 한국이라는 세 나라가 배경으로 등장하고, 시간도 중세 시대부터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가 공존한다.
집에서 함께 지내던 개가 유럽의 유명한 혈통의 개란다. 그로부터 사건은 시작된다. 이 개의 혈통과 보존에 힘쓴 사람이 스페인의 권력자였던 고도이라고 하면서, 그를 둘러싼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이에 프랑스로 유학갔다가 이 개의 부모를 데리고 오게 되는 사람의 이야기(박유정-김상우, 정채민), 그리고 현재 이시봉을 둘러싼 사건이 전개된다.(정채민이 대표로 있는 앙시앙 하우스와 이시봉을 키우는 이시습과 친구들, 박유정의 아들 김태형)
세 가지 사건이 잘 연결이 되어 박진감 있게 전개되고 있어 소설은 순식간에 끝부분을 향해 달려가게 된다. 그런데 끝부분이 무언가 좀 아쉽다. 도대체 왜 그런 일을 벌일까에 대해서 명확한 결말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인데...
명확한 결말은 나오지 않지만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 있다. 개를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형태여야 하는지, 이를 다른 존재로 확장하면 사랑이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맹목적인 사랑을 주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개들을 통해서 돈을 벌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중첩되고 여기에 있는 사람들의 재산 싸움도 펼쳐지니...
사랑하는 대상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또 사랑하는 대상을 자신의 마음에 맞게만 하려고 하는 것도 역시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란 상대를 온전히 인정해주는 것, 그러한 사랑을 받는 존재를 소설의 서술자라 할 수 있는 이시습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시습이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든 외할머니는 네가 어떻게 자랄지 궁금하다는 말로 사랑을 표현한다. 믿음, 상대를 나의 기대에 맞추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
이러한 할머니의 사랑이 이시습이 이시봉을 사랑하는데, 또 자신을 돌아보는데 도움이 된다. 그렇다면 할머니의 사랑과 반대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소설 속 정채민이나 김상우의 모습이다. 이들에게는 자신의 이익이 먼저다. 상대를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어떻게든 자신의 이익을 얻으려고 한다. 결코 자신들은 인정하려 하지 않겠지만...
이를 소설에서는 이시습의 입, 또는 김상우의 아내였던 박유정의 입을 빌려 '인색하다'고 한다. 인색함이란 무엇인가?
'자신이 지키고 싶어하는 것만 바라보며, 다른 사람의 마음은 헤아리지도 못하는구나. 그게 인색한 거구나' (493쪽) - 이시습의 생각.
이것이 이시봉과 같은 혈통의 개를 키우고 분양한다는 앙시앙 하우스의 수의사에게 하는 말이지만, 이는 그 회사의 대표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바로 이 인색함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이시봉과 이시봉의 혈통을 이야기하고, 그 개들을 들여오게 되는 과정에서 '박유정-김상우, 정채민'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보여준다.
'박유정이 생각하는 인색이란, 마음이나 생각이 오직 하나뿐인 것이었다. 종교인이 종교만 생각하고, 아이 엄마가 자기 아이만 생각하고, 고리대금업자가 이자만 생각하는 것, 그 외는 아무것도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것.' (338-339쪽)
결국 인색함이란 '홀로'와 연결이 된다. 남을 나와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 '나'를 중심에 놓고 내 이익에 도움이 될 때만 상대를 받아들이는 것. 내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가차없이 내치는 것. 그것이 바로 '홀로'이고 이는 상대를 나와 대등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 자세다.
이런 인색함과 대비되는 것이 따지지 않고 사랑을 주는 것. 그러니 이시봉은 함께 살았던 이시습에게도, 정채민에게도 사랑을 준다. 명랑하고 투쟁 없게.. 이 투쟁 없는 삶이라는 말이 왜 들어갔을까 생각했는데...
이 소설에서 투쟁은 인색함과 연결이 될 수도 있겠구나 했다. 물론 '투쟁'은 필요하고, 사랑과 연결이 될 때가 많다. 사랑이 없으면 투쟁도 없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을 바탕으로 한 투쟁은 필요하고, 이는 이시습의 아빠가 투쟁의 현장에서 빠져나오지만 그 미안함으로 자신의 뒤를 이어 노조 간부가 되는 후배 이시봉의 이름을 따서 강아지 이름을 이시봉이라 지은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사람 이시봉의 투쟁은 사랑이 들어 있는 투쟁이다. 그러니 인색함을 바탕으로 하는 투쟁과는 다르다. 이를 구분해야 한다. 개 이시봉의 투쟁 없는 삶은 인색함이 없는 삶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될 듯하고...
이러한 이시봉으로 인해 또 한 명의 사람이 자신의 삶을 찾아가게 되는 모습도 소설을 통해서 만나볼 수 있다. 그건 이시습과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던 아버지에게 가정폭력을 당하던 (가정폭력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이 소설의 말을 빌리면 인색하다고 할 수 있다. 오로지 자신의 감정만을 보는 사람이니까) 일명 '리다'가 그렇다.
'리다'의 아버지는 '리다'를 자신의 곁에 두기 위해 고양이들을 죽이기도 한다. 그에게는 자신의 감정 이외에 다른 존재에 대한 마음은 전혀 없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인색함이 전형적으로 나타난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사람이 사회 생활을 할 때도 그런 모습을 보인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들은 대부분 외부 사람들에게는 친절하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비친다. 정채민의 경우도 그렇다. 이게 인색함이 무서운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소설은 개-이시봉을 통해 인색함이 아니라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함을 여러 사람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을 바탕으로 한 인색함이 없는 투쟁을 하는 이시봉-이시습과 친구들, 인색함으로 무장한 투쟁을 하는 정채민과 그 주위 사람들. 그리고 인색함 없는 사랑을 주는 사람들.
시공간을 넘나들면서 이시봉과 관련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어가고, 그것을 알아가는 재미도 있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홀로일 수는 없다는 것, 홀로가 아니기 때문에 관계를 맺고, 이 관계의 바탕이 바로 사랑임을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최근에 읽은 [신영복 다시 읽기]가 생각났다. 신영복 선생은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이때 존재론을 인색함으로, 관계론을 사랑으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했다. 그렇게 우리는 사랑으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야 함을... 그것이 사람의 삶임을 소설은 이시봉-이시습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