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도담서림(道談書林)

  오래 전에 나온 시집이라 그런지 알라딘에서 찾을 수가 없다. 알라딘이 설립되기 전에 나온 책이니, 상품으로 등록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지금은 절판이 되었을 것이고... 검색해 보니 알라딘 중고에는 한 권이 있다. 판매자 중고로 뜬다. 그런데 값이!


  지금 구할 수 없는 책들, 한때 사람들에게 사용가치로 다가왔던 책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교환가치가 높아지는 경우가 있다. 책이 화폐처럼 교환가치가 우선이 되면, 책은 아무에게나 다가가지 못한다.


  이 정도로 세월이 흐른 책은 도서관에서도 퇴출이 된다. 그러면 자연스레 만나기 힘들어지니, 사용가치는 줄어들지라도 교환가치는 높아지기 마련.


자본주의 사회의 희소성 원칙이라고나 할까? 하여간, 우연히 헌책방에서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이시영이란 시인에 대한 믿음도 있었고. 이시영 시인은 짧은 시들을 쓰는 쪽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시집 역시 짧은 시들이 많다. 


그래 많지 않은 언어로 자신의 생각을 녹여내어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 표현되지 않은 언어 사이에서 사람들이 상상의 날개를 펼치도록 하는 것. 그것도 시인이 할 역할이지 않을까 싶고. 그런 역할을 잘하는 시가 내게는 사용가치가 높은 시인데...


이 시집의 제목이 된 시는 '가을 꽃'(12쪽)이란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첫행에 '진리의 길은 멀다 친구여'라고 되어 있다. 그냥 길이 먼 것이 아니라 진리의 길이 먼데, 시인은 그런 진리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시인은 어떤 사람일까? 이 시집에 시인에 관한 시는 두 편이 있다. 한 편은 한글로 '시인' 또다른 시는 한자어로 '詩人'. 그리고 '詩를 쓰려면'이란 시가 있다. 이 세 편의 시를 아우르는 것이 바로 '겨울 나무'란 시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우선 시인이란 시 두 편을 보자.


     시인


삶이 경이인 사람

언제나 새벽 바다에서 애기처럼 돌아오는 사람

돌아와 설레는 발자욱을 남기고 사라지는 사람

해지는 저녁 바다가 밀물져 오면

쓰라린 갈매기 몇 마리와 함께  

다시 시작하는 사람

넘치는 밤 파도와 맞서 싸우는 사람

밤새워 늙은 섬처럼 일하는 사람


이시영, 길은 멀다 친구여. 실천문학사. 1988년.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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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詩人


일하는 사람만이 세계의 기쁨나무를 후려쳐

쫙 벌어진 기쁨의 알밤 열매 거둘 수 있고

일하는 기쁨을 아는 사람만이

한겨울 시린 노고목(老枯木)의 밑뿌리를 도타이 감싸

이듬해 봄

그 오랜 등걸에서도 어린 새순이 자라게 한다


이시영, 길은 멀다 친구여. 실천문학사. 1988년. 31쪽


이런 사람이 시인이다. 어렵지 않은 말로 시인이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하게 하고 있는데, 그런데 시인 자신은 어떤 시를 쓰고 있나? 과연 자신이 시인이라고 정의하는 존재에 걸맞는 시를 쓰고 있나 반성하고 있다. 윤동주의 '쉽게 쓰여진 시'를 연상시키는 그런 시인데...


  詩를 쓰려면


시를 쓰려면

온몸에 저를 실어

산 같은 무게로 바위 같은 몸짓으로 활활 타오르는

넋의 푸른 숨결이 있어야 할 터인데

어느 날 만년필 끝에서 쉽게 풀어지고 씌어지는 나의 시여

너에게는 피의 냄새가 없다

말의 탐욕만이 있을 뿐

관념의 허상만이 있을 뿐

살아 있는 사람의 노여움 긴 긴 입맞춤이 없다

그 몰아치는 폭풍 속의 서늘한 눈빛이 없다


이시영, 길은 멀다 친구여. 실천문학사. 1988년. 39쪽.


윤동주는 일제시대, 그 엄혹했던 시절에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라고 자신의 의지를 다잡고 있는데... 


이시영 시인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시가 시대에 맞서지 못하고 있음을 반성하고 있다. 이 반성이 반성으로 그치지 않는다. 앞의 '시인'이란 두 시에서 말했듯이 시인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게 시인은 냉혹한 세상에 따스한 온기를 전달하려 한다.


아무리 춥고 힘들어도 그것을 버티고 새순을 내게 하는 일... 힘든 존재에게 따스한 손길을 내미는 것. 그런 자세를 지닌 사람. 시인이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이런 시인들이 있음은 당연하고...


하여 이 시집에서 '겨울 나무'란 시가 바로 이 세 시를 아우르지 않나 싶다. 


 겨울 나무


나무는 

겨울 나무는 옷 모두 벗고 아랫도리 벗고

영하 12도의 아파트 광장에 서서

아직도 제게 남은 온몸의 더운 기운을 

언 땅에 주고는

밤 하늘에 저렇듯 엄연하구나


이시영, 길은 멀다 친구여. 실천문학사. 1988년. 20쪽


이런 존재가 바로 시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존재를 작년 겨울(올 봄에)에 보았다. 꽁꽁 얼어붙은 겨울 날씨에 서로에게 온기를 나누어주던 사람들을. 아스팔트에 있던, 광장에 있던 수많은 시인들을.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바로 시였음을. 그런 시들을 통해 우리가 지금에 이르렀음을. 1988년에 발간된 시집. 1987년 민주화운동을 소환하고 있는 시들도 있는데, 그 시들과 작년(올초) 상황이 겹쳐지는데... 


일제강점기, 윤동주 시인의 온기가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듯, 87민주화운동을 거친 시대의 온기가 이싱영 시인을 통해서 전해지고, 그것이 2024년-2025년 광장의 수많은 사람들의 온기로 우리 사회를 따스하게 했다면, 그것이 지나친 억측일까?


이래저래 이 시집은 내게는 '교환가치'보다는 '사용가치'가 훨씬 높은 그런 시집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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