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다. 한 사람의 성장기. 물론 어른이 되었다고 세상 살기가 더 쉬워졌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세상살이는 여전히 힘들다. 하지만 그 힘듦 속에서도 희망이 있다. 그래서 계속 살아가려 한다.
장미숙. 학생 때 아이들은 '미숙아'라고 부른다. 이름 뒤에 호칭을 드러내는 조사 '-아'를 붙였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아니다. '미숙아'라는 명사로 부른다. 제대로 되지 않은 아이, 부족한 아이라는 뜻이다.
예쁘지도 그렇다고 특출나게 공부를 잘하지도 않는 아이. 이름으로 놀림을 받는다는 것은 학교에서 배제된다는 뜻이다. 이렇게 한 사람을 미숙아라고 하는 아이들, 자신들은 미숙하지 않다고, 잘살고 있다고, 너와 다르다는 의미에서 '미숙아'라고 부르면서 배제를 통하여 자신들끼리 어울린다.
그런 행동을 하는 자신들이 미숙하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채. 하지만 미숙은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한다. 여기에 전학 온 친구와 가까워지지만 그 친구에게 털어놓은 자신의 가정사가 소설로 나타나자 더이상 친구 관계로 지낼 수가 없게 된다.
결국 미숙이와 가까웠던 친구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미숙을 이용한 꼴밖에 되지 않는다. (여기서 미숙이의 부모를 생각할 수 있다. 분명 문학을 통해 만났을 남녀가 결혼을 한 다음 남자는 계속 문학활동을 하고, 여자는 그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문학을 포기하는 그런 모습이 미숙의 친구 모습에 겹쳐진다) 학교를 그만두고 독립 생활을 하는 미숙. 취직한 회사 역시 작은 회사다. 그렇게 미숙은 잘나간다고 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간다.
잘나간다고 할 수 없지만 미숙이 여전히 미숙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나? 그건 아니다. 미숙은 관심에서 멀어졌던 개를 데리고 와 보살핀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방치된 자신을 보는 듯했을 터.
방치된 개는 똥도 먹고 지저분하게 지내게 되는데, 이는 가난한 집의 환경에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에 기대에 차 온갖 관심을 받고 보살핌을 받던 존재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무시당하고 방치되는 생활.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주변 환경으로 인해 점점 더 힘들어지는 생활. 미숙의 생활도 그러했으리라. 그런데도 미숙은 이런 개에게 관심을 가져준다. 마찬가지로 미숙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도 나타난다.
있는 그대로의 사람을 사랑하는 존재. 그런 존재와의 만남은 지금까지의 삶 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된다. 그렇게 미숙은 이제는 똥을 먹지 않는 개와 산책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우리가 이 책에서 마지막으로 보는 장면이 바로 이 장면이다. 개와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미숙. 그 삶 앞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라도 미숙은 자신의 삶을 살아갈 것이라는 것을 마지막 장면이 보여주고 있다.
가난이 사람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를 미숙의 아버지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면, 그러한 가난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을 미숙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삶에 미숙할지도 모른다. 모두가 처음 살아보는 삶이니까. 그러니 우리는 모두 '미숙아'인데 이런 '미숙아'에서 조금씩 조금씩 성숙한 사람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주변의 도움으로, 또 자신의 힘으로...
우리 모두가 미숙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인식을 공유한다면, 미숙한 존재끼리 서로 의지하면서 도우면서 성숙한 삶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우리가 미숙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만화에서 미숙은 자신이 우월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려고 할 뿐이다.
그런 미숙이 성숙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미숙의 성장기라고 할 수 있는 만화. 마음에 잔잔한 울림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