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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담서림(道談書林)
  • 아이들의 집
  • 정보라
  • 15,300원 (10%850)
  • 2025-05-25
  • : 6,928

참 무거운 주제를 이토록 가볍게 이끌어가다니, 이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사건을 전개하는 능력, 그것을 표현하는 글재주...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사랑 아닌가 한다. 사람에 대한 사랑, 세상에 대한 사랑. 그러한 사랑이 행동으로 나서게 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작품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무겁고 우울할 수 있는 주제를 선택했다. 버려진 아이들이 아니라 납치된 아이들, 이윤을 위해 이용당하는 아이들. 그렇게 아이들을 이용하고 착취하는 어른들, 여러 단체들. 명목상으로는 참 좋은 말들을 내걸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결국 자신들의 이익이다.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라고 하지만 돈이라면 무엇이든 된다는 사고 방식과 행동. 아이들을 생명으로 보지 않고 상품으로 보는 그러한 태도들. 이런 어른들이 있는 세상이라면 아이들은 안전하지 않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 아이들이 건강하게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작가에게 이런 세상은 바꿔야 할 세상이다. 사랑이 있으면 그 사랑하는 존재를 지키기 위해 나서야 한다. 침묵하면 안 된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작가의 작품을 이끌어가는 것은 사랑이다. 그 사랑이 이토록 무겁고 우울한 주제를 밝고 경쾌하게 이끌어간다. 귀신이 나오더라도 머리가 쭈뼛 서는 것이 아니라, 이 귀신을 통해서 무언가가 해결되겠구나, 귀신이 위로를 해주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고 있으니...


환상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일들이 정리되어 전개되고 있다. 귀신이 나온다고 먼 미래의 이야기라고 환상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다. 이렇게 소설의 배경은 지금 우리하고는 너무도 다른 현실을 보여주지만, 그러한 비현실을 통해 현실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비현실을 통해 현실을 살아가게 한다고 해야 하나? 아이를 납치해 입양보내는 일, 아이들을 더 많이 수용할수록 돈을 더 많이 받는 구조, 그러한 아이들을 이용하는 어른들의 모습, 그것이 종교를 빙자해 벌어질 때, 또 과학이라는 이름을 빌어 행해질 때 얼마나 해악을 끼칠 수 있는지를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우울하지 않은 것은 이 사건들을 대처하는 인물들의 모습, 또 생기발랄한 아이들의 모습을 이 소설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집. 아이들이 언제나 갈 수 있고, 나올 수도 있는 곳.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곳. 어른들의 보살핌을 받는 곳. 그렇다고 특정한 규정에 매어 있지 않은 곳. 한번 들어가면 정해진 시간이 아니면 나올 수 없다든가, 한번 나오면 다음 날이 되어서야 들어가야 한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없는 아이들만 보호를 받는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아이라도 자신이 원하는 때에 있을 수 있는 곳. 


그러한 곳에서 보살핌을 받는 아이들은 구김살 없이 클 수 있다. 사랑받는다는 것을 아니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집에 있는 아이들은 장애가 있는 아이들이 있다. 장애, 비장애 따지지 않는 곳. 또 성적 지향을 따지지 않는 곳. 그러한 사회. 그러한 장소.


하지만 비극은 언제든 있을 수 있다. 아이의 죽음. 그리고 아이의 죽음을 살펴가면서 밝혀지는 진실.


여기에 참 이름도 고상한 단체가 등장한다. 하긴 예전 보육원들 이름이 얼마나 고상했던가를 생각하면 새삼스럽지도 않다. '어린 사람들의 행복을 지지하는 모임'이라니... 그런 이름을 가진 단체가 아이들을 돈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는 역설. 참 가당치도 않는 짓들.


아이의 죽음과 해외에 입양된 사람들의 입양과정을 살피는 과정에서 소설은 우리 사회의 치부를 보여준다. 사람을 돈으로만 생각했던 사람들, 나약한 상태의 사람들을 이용하는 사람들. 부모의 욕망과 불안감을 부추겨 자신의 이득을 챙기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반대편에 편견 없이,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으로 다른 사람과 어울리고 보살피는 사람들이 나온다. 세상은 다 나쁜 사람들만으로도, 다 좋은 사람들만으로도 이루어져 있지 않다.


그건 환상 소설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조금 더 좋은 사람들이 많은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좋은 사람들이 인정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집'은 허구다. 그러나 이러한 아이들의 집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이다. 돌봄을 개인에게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함께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 나라의 존재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은가.


거주할 수 있는 조건, 아이를 편하게 돌볼 수 있는 조건, 그리고 그것이 누군가의 의무가 아니라 시민들 모두의 보편적 의무이자 권리가 되는 사회. 소설 속 사회는 그러한 모습을 띠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무정형'이 집 관리사로 나오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이주 전과 이주 후에 집을 살펴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지 여부를 확인하는 사람. 또 이름이 무정형이다. 정해지지 않음. 그렇다. 정해지지 않음은 자신만의 편견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래서 소설은 이 무정형을 중심으로 내용이 전개된다. 이 무정형이 로봇까지도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 이 인물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세상에 귀신을 보면서도 담담하기만 하다니... 귀신이 사람을 해치기 보다 사람이 사람을 해친다는 점을 생각하다니...


이러한 무정형 때문에, 이와 비슷하다면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우리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던 공지영의 [도가니] (영화로 만들어져 더 많은 영향을 끼쳤다)가 주는 무거운 분위기를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또 그만큼 세월이 흘렀기도 했겠고, 그렇지만 여전히 사람을 돈으로 보는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안 되게 하고 있으니, 이 소설에서 그들을 '기술과학의 발전을 지지하는 사람들'이라는 이름으로 등장시키고 있다. 이들이 특정 종교단체의 교주를 지지하는 모습은 종교과 기술과학이 잘못 결합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예상하게 한다.


뭐, 앞으로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만. 이 소설을 읽으며 소설 속 '아이들의 집'은 실제 아이들을 보호한다고 했던 시설과는 정반대로 운영이 되고 있으니, 이런 소설 속 아이들의 집이 우리나라에서 탈시설 운동을 하고 있는 장애인들에게 '아이들을 시설에 가두자는 얘기가 아닌데, 그렇게 보이면 어떡하나 걱정했다'(268쪽)는 작가의 걱정은 기우라고 해야겠다.


장애인 운동이 벌이는 탈시설이 바로 이 소설에 나오는 '아이들의 집'을 운영하는 방식과 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으니.


여러모로 재미있게 읽을 수도 있고 또 우리 사회에서 벌어졌던(또는 벌어지고 있는, 입양은 현재형이니까) 일들도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좋은 소설이라는 생각을 한다. 작가의 다음 소설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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