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특이하다. 년도가 나왔다. 년도에 담긴 뜻이 무엇일까? 곰곰 생각해 봐도 무엇인지 모르겠다. 1914년이란 시집 제목이 된 시를 읽어봐도 왜 1914년인지 모르겠다.
그러니 그 년도에 일어난 사건을 검색하는 수고를 할 필요는 없다. 뭐,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는 둥, 어쨌다는 둥 하지는 말자. 그냥 우리가 지나온 시간이라고 생각하자.
첫장을 넘기면서 만난 시. 그냥 충격이었다. 이 시 때문에 다시 1914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1914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백 년 뒤 2014년이 우리에게 중요하게 다가온다는 사실.
한국 현대사를 통해 우리는 숱한 죽음을 마주했다. 그 죽음들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죽음은 늘 뜻하지 않게 다가왔다.
많은 죽음들 사이에서 살아갔던 사람을 생각하게 한다. 마주치고 싶지 않은 죽음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첫시를 읽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첫시의 제목은 '1914년 4월 16일'이다.
1914년 4월 16일
나의 생년월일입니다.
나는 아직 죽지 않은 사람으로서
죽은 친구들을 많이 가진 사람입니다.
죽은 친구들이 나를 홀로 21세기에 남겨두고 떠난 게 아니라
죽은 친구들을 내가 멀리 떠나온 것같이 느껴집니다.
오늘은 이 세상 끝까지 떠밀려 온 것같이
2014년 4월 16일입니다.
김행숙, 1914년. 한국문학. 2019년. 초판 2쇄. 9쪽.
태어난 날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태어난 날로부터 100년 뒤, 탄생이 아닌 죽음을 만나게 된다. 이토록 처연한 슬픔이라니...
백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죽음이 있었을까? 우리 사회에서 수많은 죽음들이 한 세기를 살아오는 동안 있었을 터.
친구들이 떠난 게 아니라, 내가 떠나온 것이라는 것은 용케 죽음을 피해 살아왔다는 것. 일제시대 많은 사람들의 죽음, 그리고 해방이 된 다음에 겪게 되는 4.3, 전쟁, 4.19, 광주민주화운동, 노동자 운동, 고문 등등.
이런 죽음과 함께하지 못하고 죽음에서 떠나온 삶을 살아왔는데, 그런 죽음들을 이제 21세기에는 만나지 않아야 하는데, 그런데...
다시 만난 죽음은 이 세상 끝까지 떠밀려 온 것같은 느낌을 준다. 더이상 어찌할 수 없는 이런 슬픔. 이런 죽음들. 다시는 만나지 않아야 할 죽음 앞에서, 화자는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죽음은 2014년 4월 16일에서 끝나지 않았다. 더 많은 죽음이 이어졌고, 우리는 또다시 이러한 죽음들에 떠밀렸다.
이젠 더이상 그러한 죽음이 없도록... 진정으로 그런 사회가 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