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판이 나왔다. 번역자도 달라졌고. 새로운 판이 아니라 도서관에서 우연히 이 책을 만났다. 만날 책은 만나기 마련이라고 해야 하나. 읽어보고 싶다고 목록에 넣어두고, 계속 된 시간들. 그러다 커트 보니것이라는 이름으로 검색했을 때, 내가 다니던 도서관에는 이 책이 없었다.
그런데... 보니것의 다른 책을 읽어야지 하다가 책장에 가보니, 보네거트라는 이름으로 이 책이 있다. 이래서 못 찾았구나, 예전에는 보니것을 보네거트라고 번역을 했구나. 판본이 달라지면서 작가의 이름 표기도 바뀌었구나. 참.
제목은 소설의 인물인 빌리 필그림이 있었던 수용소 이름이다. 사실 제목을 보고서는 유대인을 학살했던 아우슈비츠와 같은 수용소를 생각했다. 사람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여서 도살장이라고 했구나 그것도 한두 군데가 아니고 다섯 번째 수용소라고 제5도살장이라고 했구나. 독일 나치의 만행을 고발한 소설이구나 했는데...
이런, 읽어보니 아니다. 소설 제목이 된 제5도살장은, '그들의 주소는 이랬다. "슐라흐토프-퓐프" 슐라흐토프는 도살장이라는 뜻이었다. 퓐프는 바로 그 숫자 5였다'(180쪽)고 나온다.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맨 마지막으로 간 곳이 드레스덴의 수용소인데, 그들을 수용할 공간이 없으니 당시에 도살장으로 건축된 곳에 포로들을 수용한 것이다. 그리고 우연히 지하에 있는 그곳에 있다가 폭격에서 살아남는다. 제5도살장은 학살의 현장이 아니라, 학살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목격 현장인 것이다. 이름과 달리 생존을 하게 한 장소. 또 학살의 주체가 독일 나치가 아니라 연합군이었다는 점.
이런 만큼 소설은 나치의 만행이 아니라 연합군의 드레스덴 폭격을 다루고 있다. 제목에서 먼저 떠올린 것들을 내용이 뒤바꾸고 있다. 또 읽어보면 드레스덴 폭격의 과정이나 결과가 처참하게, 비극적으로 표현되어 있지 않다.
전쟁의 참화를 사실적으로 그렸다기보다는 그러한 전쟁으로 인한 상처,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 등을 생각하게 한다. 내용의 처참함과는 다르게 소설 전개는 가볍다. 그리고 곳곳에서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다.
또 많은 죽음들에 후렴구처럼 "그렇게 가는 거지"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는데, 죽음으로 세상이, 삶이 끝나지 않고 다른 삶들은 다른 시공간에서 계속되고 있음을 시간 이동을 하는 빌리를 통해 보여준다.
드레스덴 폭격을 목격한 빌리는 어느 순간 시간 이동을 하게 된다. 그는 이 시간에서 저 시간으로 자신을 옮겨가게 된다. 그러니 이 소설은 전쟁 때였다가, 빌리가 막 자리를 잡았을 때였다가, 더 나이가 들었던 때였다가, 여기에 환상적으로 트랄파마도어인이라는 외계인까지 등장한다. 그들이 빌리를 데리고 가, 그들 행성에서 구경거리로 삼는다. 그럼에도 빌리는 이 모든 시간을 다 경험할 수 있다.
어쩌면 빌리의 이러한 시간 이동은 딸이 빌리를 판단하는 것처럼 제 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전쟁의 참화를 겪은 사람이 정신분열을 겪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으로 인해서 그 전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없는 사람의 모습.
그러한 역사에 자신이 관여할 수 없음을,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깨닫는 일, 그것을 외계인인 트랄파마도어인들의 말을 통해서 알려주고 있다.
'과거, 현재, 미래도 빌리 필그림이 바꿀 수 없는 것에 속했다'(77쪽)고 나오는데, 이 말은 빌리의 사무실에 있던 기도문에 이어서 나오는 구절이다. 빌리의 사무실에 있던 이 기도문의 내용은 '하느님, 저에게 허락하소서 / 내가 바꾸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 평정심과 /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 용기와 / 늘 그 둘을 분별할 수 있는 / 지혜를' (76-77쪽)인데, 이는 트랄파마도어인들에게 납치당한 배우 몬태나 와일트핵의 목걸이에 있는 기도문의 내용과 같다. (243쪽)
역사를 바꿀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작가는 좋은 일만 기억하자고 한다.외계인의 관점을 빌려서 알려주고 있는 것이기도 한데...
이는 불행한 역사에 대해서 우리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죽은 자들은 살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얼마나 힘든 고통을 받았는지 살아남은 자는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침묵해야 한다. 이때 침묵은 잊으라는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우리가 할 말이 없지만 그렇다고 과연 그러한 역사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작가의 의도가 담겨 있지 않을까. 죽은 자들은 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작가는 소설의 마지막에 "새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 마리가 빌리 필그림에게 물었다. 짹짹?"(250쪽)이라는 말로 끝내는 것.
인간들은 왜 그래?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전쟁의 참화를 다루면서 이런 유머를 담은 것은 풍자다. 인간이 인간에게 초래한 비극, 그러한 비극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난감해하는 작가의 모습.
하여 소설에서는 드레스덴 폭격을 목격한 빌리인데, 그 아들인 로버트는 그린베레가 되어 베트남 전에 참전을 한다. 이런 대조적인 모습. 이것이 바로 풍자다. 작가는 전쟁의 비극을 겪었음에도 역사가 반복되고 있음을 이런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작가 역시 이러한 학살에 대해서 말하기 힘들었나 보다. 시간에서 해방된 빌리 필그림을 통해 전쟁으로 인한 비극을 보여주고 있으니... 하여 '그렇게 가는 거지'라는 말이 '그렇게 가게 하면 안 되지'라는 말로 들린다면 그것은 나만의 착각인가.
아무튼 작가의 내용 전개에 감탄하면서 읽었다. 그러면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학살들을 생각하고. 기도문의 앞부분이 아니라 중간부분을 생각한다.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라는 말을.
어쩌면 우리는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여기면서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새의 물음으로 소설을 끝낼 수밖에 없던 것인지. 우리가 여전히 침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