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중국의 여성 작가 여섯 명이 세 가지 주제로 소설을 썼다. 주제를 셋이라 했지만, 이는 3부로 나뉘었기 때문이고, 실질적인 주제는 하나다. 바로 '몸'
우리 몸에 대해서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보고 있는 소설들인데, 3부는 각각 '기억하는 몸, 조우하는 몸, 불가능한 몸'으로 되어 있다.
'몸'에 대해 이야기는 하는 것은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다. 우리 인간은 몸만으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정신만으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인간을 움직이는 작용을 하는 것이 뇌라고 해서, 뇌만 보존하고 작동하게 한다면 과연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반대로 몸은 있는데 정신이 없다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고 순간순간만을 살아간다면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의 몸이 아닌 인간이 만들어낸 세계 속의 몸은 과연 인간인가? 첫소설 김초엽이 쓴 '달고 미지근한 슬픔'에서 양봉을 하는 단하는 자신을 찾아온 규은의 질문에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드니까."(26쪽)라고 말한다. 이 답이 이상하다. 단하는 인간의 몸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실재하는 물리적 몸이 없는. 그래서 통속의 뇌조차 도지 못하는 부유하는 데이터에 불과해.'(30쪽)라는 그들의 존재에서도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는 존재가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몸은 무엇인가? 데이터가 실재하는 몸과 같은가? 영화 '매트릭스'를 보면서 혼란에 빠지는 것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이런 세계에서도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는 사람들을 그들은 찾아나선다.
데이터의 집합은 실재하지 않는가? 아니, 데이터의 집합이라는 실재가 있는 것 아닌가. 우리 인간을 나중에 데이터로 분해하고, 그것들을 다시 재조합하면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연결이 된다.
결말에서 단하는 '존재하지만 그 존재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슬픔.'(66쪽)을 느끼는데, 이는 인간의 확장형에 대한 고민과 연결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김초엽이 김원영과 함께 슨 [사이보그가 되다]에서 나타난 고민들과도 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데이터의 집합이 아니라 늘 새로운 신경조직을 재조직하고 과거를 잊는 인간은 어떤가? 과거를 기억할 수 없게 되는 인간, 시간이 지나면 뇌가 재조직되기에 언어조차도 자신이 있는 사회의 언어를 익히고 그전의 언어는 잊는 인간.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 인간의 정의에는 '지속성'이 전제되어 있지 않을까. 즉 사회적 관계라는 말은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기억을 통한 유대관계의 형성이 전제되어 있을 텐데...
순간만 있고, 기억은 없으니 과거가 없는 인간에게서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순간순간 존재하는 곳의 필요성에만 맞춘다면 그것은 과연 어떨까? 저우원이 쓴 '내일의 환영, 어제의 후광'은 그런 점을 생각하게 한다.
'언어'가 바로 기억과 지속을 가능하게 해주고, 그럼으로써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해주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는데... 흥미로운 관점의 소설이었다.
2부에 실린 소설들은 '윤회'를 떠올리기도 하는데, 물론 SF작품으로 안드로이드가 죽음을 만나는 장면을 쓴 김청귤의 '네, 죽고 싶어요'는 인간의 유한성, 그것이 축복임을 생각하게 한다. 죽음이 없는 인간이 인간일 수 있을까?
안드로이드로 수리만 잘하면 죽음과는 상관없을 존재도 인간처럼 유한한 세상에서 사랑하고 사랑받고 결국은 죽음으로 소멸하려는 마음을 지니게 되는, 우리의 유한성이 지닌 행복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인데...
청징보가 쓴 '난꽃의 역사'는 전통 소설의 기이담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윤회가 분명하게 드러난 소설. 그러나 단순한 윤회가 아니라 과학기술이 발달해서 특정 시기로 돌아갈 수 있는 시대가 설정되어 있다.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부모를 만난다. 그러나 과거를 바꿀 수는 없다. 우리가 많이 보는 시간 여행 소설(영화)들이 과거에 개입하기도 하는데, 이 소설은 과거에 돌아가 지금의 현재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시간 여행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현재와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바꾼다면,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몸은 무엇인가? 과거의 몸이 나인가, 현재의 몸이 나인가. 과거의 몸이 지금의 나로 꾸준히 성장하면서 변화해온 과정, 삶이 몸에 쌓이는 과정 없는 내 몸은 과연 내 몸이라고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내 몸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지금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단순한 '윤회'도 '시간 여행'도 아닌 그런 소설.
3부에 나오는 몸들은 불가능한 몸인데, 이는 우리가 이런 몸을 지니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들이다.
천선란이 쓴 '철의 기록'은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지능이 결국 인간을 파괴하고, 인간을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고통에 대한 감각이 없는 존재로 만들어 낸다. 그러한 몸이 과연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고통이 전혀 없는 몸. 그런 몸을 지향하지만, 고통이 없다면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삶이라는 말리 죽음 때문에 더욱 의미를 지니듯이, 행복 역시 고통으로 인해 더 크게 다가오는데... 인간의 몸에서 통증 또 정신에서 고통을 느끼는 마음을 제거한다면 그런 세상이 과연 좋은 세상일까를 생각하게 한다.
고통을 감각이라고 하면 감각을 잃은 몸이 인간의 몸이라고 할 수 있는지를 질문하고, 그러한 감각의 소중함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감각을 잃은 몸을 '빼앗겼던, 죽여야 했던 몸'(258쪽)이라고 하면서, 이러한 몸을 되찾아야 한다고 하고 있다.
우리들 삶에 수많은 감각들이 우리를 살아 있게 함을 생각하게 하는데... 이러한 감각들을 서로 공유하고 자유롭게 통제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 점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 왕칸위가 쓴 '옥 다듬기'다. 머리에 칩을 심으면 생각을 공유할 수 있다는, 상대와 내가 감정을 서로 공유할 수 있다는 옥. 또 그러한 감정을 잘 통제할 수 있게 된다는 옥. 하지만 이것은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다.
또한 칩으로 인해 우리의 감정을 통제한다는 것이, 서로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 축복일까? 소설에서는 다양한 부작용이 나오고, 그것들이 지닌 문제점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인류는 포기하지 않고 다른 방법을 찾아가겠지.
지금 인공지능이 학습을 통해서 인간의 수준과 비슷한 어쩌면 더 뛰어난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인공지능에 인간의 감정까지 담을 수 있다면, 이 감정들을 서로 공유하고 제어할 수 있게 된다면, 그때 인간은 무엇인가?
그러한 칩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몸이 과연 지금 인간의 몸이라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바라는 우리의 몸은 어떤 것인가?
총 3부로 나뉘어 우리 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하는 소설집인데, 지금 과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더 많이 논의가 되어야 하는 문제이지 않을까 한다. 이제는 단지 '사이보그'의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내 몸의 주체가 바로 나라는 생각을 지니고 살아왔던 인간에게 당신 몸은 다른 것에 의해 움직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소설들... 어쩌면 그런 세상이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는지도, 그래서 단순히 소설 속 상황에 그치지 않고 현실에서 우리가 맞닥뜨려야 할 문제가 될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좀 섬뜩하긴 하지만....
이런 점에서 좋은 소설들이었다. 무엇보다도 읽기에 편했고, 읽는 재미도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