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의 양육과 관련한 사안을 판결할 때 ... 법정은 아동의 복지를 무엇보다 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 (아동법(1989) 제1조 (a)항
무엇이 아동의 복지인가? 아동에게 가장 좋은 환경을 만들어줄 수 있도록 판결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아동 복지 아닌가?
이 소설에는 법정에서 판결한 다양한 사건들이 나오지만, 앞부분에서는 특히 세 판결에 집중한다. 하나는 샴쌍둥이로 태어난 아이 중에 한 명은 신체 기능이 상실되어 죽어가고 있는데, 분리 수술을 하면 한 아이는 죽지만 다른 아이는 살 수 있게 된다. 이때 법원은 수술을 허용해야 할까, 하지 말아야 할까. 소설에서는 수술을 허용한다. 그러나 그러한 판결 이후에 판사(피오나라는 59세의 여성 판사)의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이 판결이 최선이 아니었을까?
두번째는 유대인 공동체와 관련된 판결인데, 아빠는 유대인 공동체 내에서 여자 아이들이 교육을 더 받지 않고 아이를 많이 나아 생활할 수 있게 하려 하고, 엄마는 아이들이 대학 교육까지도 받기를 원하는 상태. 판사는 엄마의 편을 들어준다.
이 두 사례는 그렇게 논쟁거리가 되지 않는다. 무엇이 아동에게 더 좋은지를 판단하는데, 그렇게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 번째 경우가 생긴다. 백혈병에 걸린 아이를 치료하는데 수혈이 필요하다. 부모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수혈을 거부한다. 아이 역시 부모와 마찬가지로 수혈을 거부한다. 병원에서는 수혈을 할 수 있도록 긴급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청한다.
아이가 충분히 판단할 지적 능력이 있고, 또 종교의 자유도 보장하고 있는 나라에서, 아이와 부모의 판단을 거슬러 수혈을 하게 하는 결정을 판사가 할 수 있을까?
요즘 존엄하게 죽을 권리에 대해서, 존엄사 문제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있는데, 치료받지 않을 권리가 환자에게 있다고 무조건 환자의 의견을 따라야 하나? 명백히 살릴 수 있는 치료법이 있는데, 그것이 종교 교리와 맞지 않다고 거부하는 사람에게 당신 의견을 존중합니다 해야 하나?
피오나 판사는 아이를 직접 만나본다. 그리고 수혈을 해도 된다고 - 그것을 법원이 허용했다고 판결한다. 아이는 살아난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논쟁거리가 없다. 하지만 이 부분까지는 소설의 중반에 해당한다. 아이가 살아난 다음 이야기가 논쟁적이다.
아이는 종교적 신념을 잃는다. 부모는 아이에게 계속 종교를 강조한다.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잃은 아이, 부모와 갈등하는 아이. 판결이 난 뒤의 일을 판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소설은 이 점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어떤 사건에서 판결로 그 사건이 종결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이야기할 것이 없다. 하지만 판결 이후의 문제가 더 아동에게 문제가 된다면? 판사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이 점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철통같이 믿어왔던 종교적 신념이 깨졌는데, 부모는 계속 그 종교를 믿으라 하고, 자신은 어디에서도 다른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데, 아이는 판사를 찾아간다. 판사 역시 지금 가정 문제로 흔들리고 있는 상태.
아니, 흔들리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하더라도 판사가 어디까지 해줄 수 있을까? 아이는 함께 살게 해달라고, 함께 살면서 자신의 길을 찾겠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판사는 아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아이를 보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뒤, 아이는 다시 백혈병에 걸리고 이번에는 수혈을 거부한다. 이것이 다시 종교에 귀의에 종교적 신념을 지킨 것일까? 피오나 판사의 관점은 다르다. 아이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이라고... 이 사회에서 자신이 설 자리, 사는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피오나 판사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었을까? 아이를 집에 들이는 일. 판사가 판결 이후에 그런 일까지 해야 할 책임이 있을까? 없다. 판사는 판결할 뿐이다. 다만, 그 판결로 다른 삶에 들어선 아이가 필사적으로 매달리면서 도움을 요청하면?
그런 요청에 묵묵부답, 무시할 수 있을까? 무시해야 최선일까? 소설을 읽으며 결말을 향해 갈수록 죽음은 다가오는데, 그것이 어떻게 다가올지 계속 생각하게 된다.
아이의 죽음으로 피오나 판사는 자신의 판결에 대해, 아이가 도움을 요청했을 때 자신이 어떻게 해야 했을까를 이렇게 정리한다. 어쩌면 이것이 판사라는 다른 사람에게 판결을 내리는 사람이 명심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한다.
'복지, 안녕은 사회적인 것이다. 아동은 섬이 아니다. 법정을 벗어나면 내 책임도 끝난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아이는 나를 찾아왔고, 그 애가 원했던 건 모든 사람이 다 원하는 것, 초자연적인 힘이 아닌 자유로운 사고를 하는 사람만이 줄 수 있는 것이었는데. 그건 '의미'였어.'(288쪽)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온 아이, 그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는 아이에게 피오나 판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다른 세계에서 살아갈 의미를 찾게 해주는 것, 그것이 신과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사람이 이 세상을 잘 살아가도록 하는 의미를 발견하도록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아동의 복지를 끝까지 책임지는 자세, 적어도 판결을 내리고 자신에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는 아이에게 해줄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물론 그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피오나 판사는 아이에게 수혈을 하도록 하는 판결을 하면서 '본 판결에서 A의 존엄성보다 소중한 것은 A의 생명입니다'(169쪽)라고 했다.
아이의 생명을 살려냈다. 그 다음은? 아이의 요청이 있다면 아이가 존엄성을 지니고 살아갈 수 있는 자세를 지니도록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도움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해도 도움을 주려는 모습을 보면, 그러한 모습을 통해 아이가 '의미'를 찾아가기 않겠는가.
중간까지 피오나 판사의 판결에 감탄하면서 읽어가는데, 소설에서 더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은 판결 이후 아이와 피오나 판사의 관계다. 이 관계,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아이에게 판사는 과연 법정에 한 판결로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을까? 무어라 말하기 쉽지 않은 문제인데, 판결 이후의 문제를 파악하고 그것에 대처하는 판결까지 할 수는 없을까?
이런 기대 역시 판사에게 초자연적인 능력을 요구하는 것은 아닐지... 그렇다면 한 사람의 삶을 좌우하는 판결은 도대체 어떠해야 하는지를 계속 생각하게 하고 있다. 이 소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