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지구가 아닌 지구인들이 개척한 행성. 그러나 아직 외계 생명과 접촉하지 못한 인류가 등장한다.
컴퍼니는 콜로니라고 개척한 행성에서 살기 힘들어지자 다시 이주를 결정한다. 이때 그곳에서 40여 년을 살아온 오필리아는 이주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나이도 들었고 또 자신이 직접 땅을 만지고 재배할 수 있는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몰래 홀로 남는다.
홀로 남은 오필리아는 자유를 만끽한다. 남들의 시선에, 자식들을 부양하는 일에, 공동체의 의무에 종속되어 있던 오필리아는 비로소 자신만의 세계를 갖게 된다. 이 세계에 다른 생물이 들어오게 되는데... 괴동물이라고 하기도 하고, 학자들은 객관적인 용어랍시고 '자생종'이라고 하기도 하는, 인간과는 다른 종족이 그곳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이 이동해서 오필리아가 지내고 있는 곳으로 오는데... 이들과 어떻게 지낼 것인가? 공존이냐 죽음이냐? 그들은 오필리아를 적으로 여기지 않는다. 오필리아 역시 두려움이 있지만 그들에게 생활공간을 내어주고 또 자신에게 필요한 것, 그들이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들을 알려준다. 자연스레 그들은 공존하게 되는데...
이 공존이 인간들과 지낼 때 오필리아의 일거수일투족을 제어하게 만들던 것과는 다르게 오필리아의 자유를 존중해준다. 이렇게 오필리아가 잘 지내고 있을 때 떠난 콜로니에 생명체가 있다는 것을 안 인류가 탐사대를 파견하고...
탐사대와 만난 오필리아는 그들에게 자신과 함께 지내는 종족을 이해시키려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오필리아는 인간과 그들을 잇는 존재로 살아가게 되는데...
주변부 인물이 중심 인물이 되는 과정.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존재는 권력을 휘두르는 존재가 아니라 남들을 보살피고 이끄는 사람이어야 함을, 오필리아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데...
주부로서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최선을 다해 살았던 오필리아는 어떤 특정한 관념에 싸여 있지 않다. 외계 생물을 괴동물이라고 여기지만, 그것은 자신이 처음 본 생물이었기 때문이고, 이 용어를 비하나 적대적인 의미를 담아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공존의 지혜를 지니고 있는 오필리아. 또한 그들과 최선을 다해 소통을 하려고 한다.
소통이 바로 공존의 기본 아니겠는가. 말이 서로 다르지만 그들은 마음으로 어느 정도 통한다. 서로가 적이 아님을, 서로가 서로를 도울 수 있음을. 하여 다름을 조금씩 좁혀 나가는 노력을 한다. 이는 서로 교류를 하되 넘어서는 안 될 선은 넘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상대에 대한 평가를 하지 않는 것. 그냥 그렇게 지내는 것. 그들의 생활이 우리와 다르더라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 우리의 생활이 그들이 보기에도 이상할 수 있다는 것. 존중이다. 이 존중이 꼭 상대를 따라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내 것을 지키되 상대의 것도 존중하는 것. 그것이 공존의 기술이고 소통의 원칙 아니겠는가. 그들 종족에게서 아이가 태어나고, 오필리아는 그들에 의해 아이를 돌보는 존재, 즉 둥지수호자로 인정받는다. 둥지수호자. 그렇다. 이는 미래 세대를 책임지는 역할을 하는 공동체의 지도자인 것이다.
이렇게 소설은 행성에 남겨진 오필리아가 다른 생명체와 만나 그들과 교류하고 그들의 둥지수호자가 되어 인간과 그들을 잇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동안 겪게 되는 오필리아의 모험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간 사회에서 나이 들었다고, 여성이라고 그다지 존중받지 못했던 오필리아. 이는 우리 사회의 척도 아니겠는가. 지혜와 지식을 혼동하여 학위가 있으면 전문가고, 실생활에서 얻는 지혜를 지닌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현상.
하지만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그런 전문가들이 무슨 역할을 하는가? 책에서 본 내용을 읊조리기나 할 뿐, 실제 해결은 생활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들이 나서서 하지 않는가. 그것도 사회에서 어리석고 쓸모없다고 제외시켰던 사람들이.
이는 쓸모없음의 쓸모라는 동양 고전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콜로니를 건설하는 사람에게 나이든 사람은 또 자신들이 추구하는 방향과 맞지 않는 사람은 비용만 드는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처음 겪는 위기에 봉착했을 때 그 위기를 넘어가게 하는 사람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이 쓸모없다고 여겼던 존재들.
이들은 사회에서 배척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남들을 쉽게 배척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이해받지 못하고 오해받은 경험이 있기에 상대를 이해하려는 마음을 지니게 된다. 받아들이려는 마음, 소통하려는 마음. 그런 마음을 지닌 오필리아는 괴동물들과 함께할 수 있다.
그들을 내치려하지 않으니까. 물론 처음에는 힘이 없어서 받아들인다고 하지만 그들의 다른 면을 보게 되고, 서로가 잘 지낼 수 있는 경계를 설정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여야 하지 않을까.
소설을 읽으면서 앞 부분과 뒷 부분의 갈등 상황이 달라지는데, 홀로 남아 괴동물을 만나 함께하는 장면과 여기에 다시 본사(지구)에서 파견한 탐사대가 와서 겪게 되는 일로, 앞부분이 오필리아의 공존기라면 뒷부분은 오필리아가 당당하게 자신의 자리를 잡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흥미진진하게 읽은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명심하고 싶은 구절이다.
'좋은 둥지수호자는, 파란 망토는 말했다. 새끼들이 모든 것에 관해 최대한 많이 배우기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태세를 갖추기를, -열광하기를- 바란다. 나쁜 둥지수호자는 새끼들이 계속 같은 것에 만족하게 만들어 그들이 안온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368쪽)
우리 역시 둥지수호자가 된다. 어떤 둥지수호자가 될 것인가. 오필리아는 전자를 선택했다. 자, 지금 우리의 모습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