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도담서림(道談書林)
  • 결혼을 향하여
  • 존 버거
  • 7,650원 (10%420)
  • 1999-01-25
  • : 159

섬세하다. 부드럽다. 문장들이 간결하다. 물론 영어로 읽지 못하고 번역으로 읽었지만, 번역으로 읽어도 문장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고 문장의 아름다움만 두드러지지 않는다. 간결한 문장에는 길고 긴 역사가 담겨 있다. 우리가 살아온 역사가.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역사도.


결혼을 향하여... 죽음을 향해 가는 줄 알면서도 결혼하려고 하는 한 쌍이 있다. 아니, 여자가 거부해도 남자가 한사코 결혼해야 한다고 한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시간을 조금 늘려보면 이해가 된다.


어차피 우리는 죽는다. 죽음을 향해 살아간다. 그 시간이 길거나 짧을 뿐이다. 에이즈에 걸린 니농. 그렇다고 방탕한 삶을 산 것도 아니다. 우연히 걸렸을 뿐이다. 사랑의 결과라고,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가혹한 질병이다. (지금은 에이즈를 완치하지는 못해도 만성질환 정도로 여길 수 있게 치료제가 개발되었다고 한다. 다만, 이 소설은 1990년대에 발표된 소설이니, 그 당시 에이즈는 죽음으로 가는 질병이었다)


사귀던 친구 지노에게 이별을 통보하는 니농. 하지만 지노는 니농을 포기하지 않는다. 어차피 사람은 죽는다. 죽기까지 사랑을 하면 되지 않는가. 지농은 니농에게 결혼하자고 한다. 결국 니농의 허락을 받은 지노.


여기까지만 보면 그냥 청춘의 사랑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니농에게는 체코인 엄마가 있다. 체코 민주화 운동과 관련이 있는, 체코로 돌아가 오랜 시간 다시 돌아오지 못한 엄마. 여기에 철도 신호원인 아빠가 있고. 이들 역시 공산주의와 관련이 있다. 즉, 이들은 사회가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도록 노력을 했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헤어진 뒤 만나지 못한다. 니농을 아빠인 쟝이 키운다. 그리고 딸이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현대사의 비극에 개인의 비극이 중첩이 된다. 소설은 이들의 결혼식을 향해 가는 아빠인 쟝과 엄마  제나의 이야기도 펼쳐진다. 그런데, 이들 이야기를 전해주는 사람이 눈이 먼 사람이다. 눈이 먼 사람. 한때는 눈이 멀지 않았는데, 눈이 멀었다는 것은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의 사상만으로는 살 수 없지만, 그렇다고 현대에 적응하기에는 무언가 빠져 있는 듯한 느낌. 장님인 서술자가 중요한 비중으로 나오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일인칭으로 니농이 서술하기도 하니까.


니농과 지노의 결혼식을 정점으로 쟝과 제나가 각각 오게 되는 과정, 오면서 그들이 겪는 일들과 과거의 일들이 서술되면서 현대사가 개인의 삶으로 들어오게 된다. 이런 역사가 짧고 간략한 문장, 아름다운 서술로 마치 풍경처럼 펼쳐진다.


그래서 니농의 결혼식은 이들의 만남뿐만 아니라 행복의 극치를 보여준다. 분명히 다가올 비극은 현재에 자리를 비켜주어야 한다. 비극은 비극일뿐, 그것이 현재를 강제할 수 없다는 것. 지금 이러한 행복을 위해 꾸준히 오게 된 것. 이것이 존 버거의 [결혼을 향하여]라는 소설이다.


무엇보다 죽을 병에 걸렸다고 헤어짐으로 끝나는 관계가 아니어서 좋다. 몇 년이고, 몇 십 년이고 결국 만남은 이별로 끝난다. 그러니 만남과 헤어짐은 보편적인 인간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시간의 길이로 판단해서 결정하면 안 된다는 것을...


행복은 결코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는 점을... 사랑을 하는 동안의 시간은 영원임을, 그 영원이 서로의 삶을 이어주고 하나로 되게 만들었음을 이 소설은 잘 보여주고 있다.


어떤 질병에 대한 편견, 그로 인한 사람에 대한 배척,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이 소설을 읽으면 느낄 수가 있다. 에이즈에 걸린 니농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그녀를 사랑하는 지노가 얼마나 멋있는 사람인지, 그러한 둘의 사랑을 응원해주는 주변 사람들의 모습에서 인간 공동체를 생각한다.


그렇게 우리는 사랑하고 헤어지고 또 사랑하면서 세상을 살아감을, 그것이 인생임을, 이 소설을 [결혼을 향하여]를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