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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담서림(道談書林)
  • 녹색평론 2024년 겨울호
  • 녹색평론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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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05
  • : 1,280

시민(侍民)이라는 말을 생각한다. 우리가 시민하면 떠올리는 그 시민(市民)이 아니라, 백성을 섬긴다는, 백성을 사람으로 바꿀 수 있으니 사람을 섬긴다는 그 말. 동학에서 쓰는 시민(侍民). 


동학에서 쓰는 시천주(侍天主)라는 말을 들어본 사람은 많을 것이다.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유일신이 아니다) 천주를 모신다는 말. 그런데 천주가 꼭 하느님이어야 하는가? 아니다. 하느님은 바로 곁에 있는 우리들이다. 사람들이다.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들이다. 땅도 하늘도, 물도, 풀도, 동물도 모두 하느님이 된다.


그러니 시천주라는 말은 결국 시민이라는 말과 통하고 시민이라는 말은 모든 것을 섬긴다는 말과 통한다고 보면 된다.


이천식천(以天食天)이라고 하늘로서 하늘을 먹는다는 말, 결국 사람이나 동물들 또는 다른 존재들은 다른 존재들의 생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 하늘이 하늘을 먹는 삶이 곧 우리들의 삶이라는 것이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 또다른 하늘을 내 속으로 받아들이는 일, 언제가는 나도 그들의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일. 그런 깨달음을 얻었다면 어떤 생명도 소홀히 할 수가 없다. 모두가 하늘이므로.


이런 정신을 지니고 살아간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먹을거리가 남아돌아 어디서는 버리고, 어디서는 없어서 굶주리는 일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중한 생명을 도외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강제로 자신의 의지를 남에게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남 역시 나일 테니까. 다른 존재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생명을 경시하는 삶을 살 수가 없다. 생명을 중시하는 삶, 그런 삶은 평화로울 수밖에 없다.


평화로운 세상을 향해 가는 일, 그것이 바로 시천주고, 시민(侍民)이다. 이런 시민(侍民)의 자세를 지니고 있다면 자신의 권력을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일을 할 수가 없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도한 짓을 하는 존재를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다. 그는 시민(侍民)과는 반대에 있는 존재이므로, 하늘을 해치는 자이므로, 그가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이 바로 시민(侍民)을 하는 자세다. 의무다. 책임이다.


지금 우리는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 무도한 자와 그를 비호하는 자들. 시민(侍民)이 뭔지 생각도 하지 않는 자들. 평화를 깨뜨리는 자들. 도무지 다른 존재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자들. 저들만 옳다고 생각하는 자들. 


이들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무도한 짓을 하지 못하게 하는 길은 시민(侍民)의 마음을 우리 마음속에 새기는 것이다. 시민(侍民)의 마음이 깃들었다면 이제 행동으로 나설 수밖에 없다. 그것이 시민(市民)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런 시민(市民)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존재가 바로 시민(侍民)이므로.


예전 동학 혁명에서 그러했듯이. 그런 행동이 폭력으로 나타나는가? 아니다. 시민(侍民)은 모두를 아우르는 말이기 때문에 평화로운 행동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 평화가 권위를 지녀 무도한 자들이 어쩔 수 없게, 어찌할 수 없어 따를 수밖에, 그렇게 따르다 보면 어느 순간 회심의 순간이 올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모인 시위 현장이 돌이 날아다니고 폭력이 난무하는 것이 아니라 색색의 응원봉들이 펼쳐지고 있는 평화로운 현장. 이런 평화로운 시위야말로 시민(侍民)의 정신이다. 우리는 이미 시민(侍民)의 정신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니 평화로 무도함을 대체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평화가 지속되게 하기 위해서는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사람만 갈아치우는 것이 아니라 제도로 정착이 되게 해야 한다. 그런 제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시민(侍民)의 정신을 지닌 사람들이 공론장을 형성하고, 그것이 안착되도록 해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시민(侍民)의 정신은 지금 지구가 처해 있는 기후 위기도 극복할 수 있게 할 것이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정치적 위기도 이겨내게 할 것이다.


[녹색평론] 188호를 읽으면서 이 시민(侍民)이라는 말이,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시민(市民)과 겹쳐졌다. 그렇다. 시민(市民)은 결국 시민(侍民)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민(侍民)들이 우리 사회를

평화롭게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호에서 다루고 있는 '물'에 관한 글이나 '농업'에 관한 글, 그리고 영화 또는 영화 감독에 대한 이야기도 시민(侍民)이라는 말을 생각하게 한다. 자연을 거스리는 물 관리법은 시민(侍民)이 아니다. 성장을 위한, 자본을 위한 농업 역시 시민(侍民)이 아니다. 단지 시간을 보내거나 또는 폭력이 난무하는 그런 영화 역시 시민(侍民)이 아니다. 


우리 삶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 문학, 예술이 시민(侍民)이고 자연의 흐름을 살리는 물 관리가 시민(侍民)이며, 성장이 아닌 모두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적인 농업이 바로 시민(侍民)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앙에 집중된 권력을 분산해야 한다.


이름만 지방자치가 아니라 실질적인 지방자치가 되도록 해야 한다. 지역에 맞는 정책이 실행되어야,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또 지역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존재들을 고려하는 정책이 실시되어야 진정한 지방자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지방자치는 바로 시민(侍民)의 실현이 될 것이다.


[녹색평론] 188호에는 이런 점을 생각하게 하는 글들이 많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으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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