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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책이야기
  • 타인을 듣는 시간
  • 김현우
  • 13,500원 (10%750)
  • 2021-11-30
  • : 947

어떤 문장은 그 문장이 나올 때까지의 시간을 짐작하게한다. 단어를 정교하게 골라 쓴 문장의 정확함은 천재성이나 번득이는 영감의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오랫동안 곰곰이 생각하고, 여러 단어들을 대입해 보고, 수정해 온 결과인 경우가 더 많다. 정확한 문장에서 느끼는 감동은, 거기에 들인 시간에 대한 존중의 마음이기도 하다.- P29
어떤 경험들은 여전히 단어에 굶주려 있다. 그건 어떤 이들의 경험은 같은 특징을 지닌 이들끼리의 수평적 모임을 벗어나는 순간,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다는 뜻이고, 그런 까닭에 외부인들의 편견에 따라 제멋대로 해석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P44
환대란,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은 사람에게 미리 적대적인 마음을 갖지 않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환대는 이해 여부와 상관없이 우선 타인에게 ‘당신을 해칠 마음이 없습니다."라고 표현하는 것에서 시작될 것이다.- P46
같은 단어에서 여러 의미를 읽어 내고 나면 우선은 쓸쓸하다. 각자의 의미 안에 갇힌 개인이 쓸쓸하지 않을 도리는없다. 하지만 그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타인에게 결례를 범하지 않는 전제 조건일 것이다. 나는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이 싫고, 그 말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우리는 남이다. 우리가 남이라고 생각해야 우리는 서로에게 결례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 아마도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다를 그 개인의 의미들을 모두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을 해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누군가에게는 결례를 범하게 될 테지만, 결례를 적게 범할 수는 있다.- P97
이런 호기를 부리는 이들이 역겨운 것은, 타인의 감정보다는 그것을 전하는 자신의 감정에 더 취해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이런 자아도취에 빠진다. 자신이 전하는 이야기의 내용보다는 그것을 자신이 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해져 버린 사람들.- P111
어째서 개인들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들이 그들이 살고 있던 어떤 시기 어떤 공간에 대한 사회적 기록이 될 수 있는가? 그런 단위의 확장이 가능한 것은, 개인은 개인이면서동시에 사회적 관계들이 교차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또한개인이 ‘자신의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하고 만들어 가는 서사는 그 개인이라는 장소에 교차하고 있는 사회적 관계들이 얽히는 서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이야기 안에서, 그의삶에서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은 따로 떼어 낼 수 없다.
개인의 몸은 하나이기 때문에, 그가 겪는 어떤 사태는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의 구분 없이, 단 한 번만 통째로 경험되기 때문이다.- P125
‘이해하다’라는 뜻을 지닌 understand의 어원은 ‘(어떤 것의)한가운데에 서다, 사이에 서다‘ 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해의 대상 ‘안으로‘ 들어가서 대상의 위치에 서 보는 것이 이해다. 그것은 위치의 이동을 전제하는 행위이고 기존의 위치,
즉 나의 맥락을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이해란 머리나 마음이아니라 행동으로, 몸으로 하는 것이다. 때로 그렇게 자리를이동하고 나면 원래 내가 있던 자리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이해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떤 의미에서는 위험한 행동이기도 하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은 채, 자기가 앉은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남발하는 이해가, 그런 이해를바탕으로 전하는 이야기나 행동이 공허한 이유다. 그때 채워지는 것은 자기 자리를 벗어나지 않은 사람의 자기만족밖에없다. 만족스러울지 모르겠으나 외롭기도 한 마음일 것이다.- P139
사람보다 동식물을, 그것도 죽어서 화석이 된 동식물을 더 많이 보고 다닌 듯싶은 그해에 내가깨달은 것은 인간은 지구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인간이 주인공이 아닌데 나 따위가 주인공일 리 만무했다. 내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 하는 그 깨달음이 이상하게도 위로가 되었다.- P209
나에게 익숙한 것들 중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것이 내가 진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며 얻은 가장 큰 깨우침이다.- P211
하지만 그 속도가 답답하다고 섣불리 일반화하는 것은 아마 잘못된 선택일지 모른다. 한 명씩 한 명씩 개인을 들여다보는 과정이 느려서 아쉽다면 부지런히 많이 만나고 많이 듣는 수밖에 없다. 반복은,
그렇게 꾸준히 뭔가를 쌓아 가는 습관은 의외로 힘이 세다.- P221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를 다 동원한다고 해도 타인의 경험을 온전히 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나의 삶에 대입해 보는 정성을 보일 수는 있다. 그 정성과 노력이 전해지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이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거라고, 나는 여전히 믿고 있다.-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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