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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우스와 프로메테우스와 아테나는 각각 황소와 사람과 집을 만든 뒤 비난을 심사원으로 초청했다. 비난은 그들의 작품을 시샘하며 말했다. 먼저 황소가 어디를 떠받을지 볼 수 있도록 제우스가 뿔에다 눈을 달지 않은 것은 실수라고 했다. 프로메테우스 역시 사악한 자들이 숨지 못하고 저마다 마음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 드러나도록 사람 마음을 밖에 매달지 않은 것은 실수라고 했다. 세 번째로 비난은, 악당이 이웃에 자리 잡고 살면 쉽게 이사 갈 수 있도록 아테나가 집에다 바퀴를 달았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제우스는 그의 비방에 화가 나서 비난을 올륌포스에서 내쫓았다.

-<124. 제우스와 프로메테우스와 아테나와 비난> 전문,  청소년과 성인을 위한 정본 『이솝우화』 145면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을 만큼 완벽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우화의 '공식' 메시지이다.  이 메시지(교훈)를 두 가지로 분리한다. 1)모든 것은 비난할 수 있다. 2)(말 그대로) 완벽한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1)은 비난에게서 자유로운 타인은 없다. 곱씹을수록 무섭다. 그러니 신중하라. 2)는 그러므로 겸손하라, 한 발 물러서라. 그렇게 거리를 두고 사태(사건, 상황)를 바라보라.  비난의 대상(1))에서 벗어나기가 힘드니까.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안다는 것'을 '나는 모른다는 것을 안다(무지의 지)'고 역설하였다. 나는 완벽하지 않다. 내 논리는 완벽할 수 있다 그리고 언젠가 공략될 수 있는 성(城)이다-난공불락(難攻不落)의 철옹산성(鐵甕山城)일 수 없다.  그렇게 말이든 행동이든 시작하는 것이 좋다, 라는 메시지다.  

'<...아테나와 비난>이다. 이처럼 '비난' 자체도 완벽할 수 없겠지만, 우화가 그럴듯이 비난은 단지 한 이름(단어, 개념)으로만 등장하지 않는다. '비난'에게도 '인격'이 부여되어 있는데, 어린이일 때는 그렇게 여기지만 '머리가 굳어진' 어른들에게는 사라진 '인격'이 우화에는 있고, 있다고 여기기에 모든 우화는 어린이들이 주요 독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쨌든 본문 속 '비난'이 견지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제우스-황소]:  황소는 막무가내로 어디나 들이박아 과실치사(혹은 과실치상)를 하거나 무엇이든 파괴(핵무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항공사고 예방하려고 고층건물 일정한 높이에 부착하는 경고등처럼, 황소의 뿔에도 눈을 달았어야 한다.  자동차 후미 브레이크등도 같은 맥락이다. 여기에는 스스로 조심하고 한 발 물러서는 배려가 있다.   

[프로메테우스-사람] : 열 길 물속 알아도 한 길 사람속 모른다는데, 왜 그것까지  생각하지 않았느냐, 배려가 부족했다.  사랑은 하트(심장)이라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을 받는 사람의 마음을 알지 못해 상사병에 걸리고, 그로 인한 사건사고가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이것은 나는 이런 사람, 내 마음은 이래요, "누가 이 사람(나를) 모르시나요"처럼, SNS시대에는 심장(마음)이 몸 밖으로 튀어나와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지적질 하는데 설득력 얻고 있다.  

[아테나-집] :  바퀴가 달린 집이  실현 되었지만,  층간 음 때문에 벌어지는 살인사건 등 살기 위해 마련하고 살고 있는 집을 선택하는 일이 쉽지 않아,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느냐,  '캠핑카'나 '이동식 주택' 출현은 비난의 주장을 그저 비난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비난은 누가 만들었을까? 신적인 존재가 창조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제우스와 아테네는 12신클럽 멤버이고,  인간을 창조한 프로메테우스는 그들에게는 반신이겠지만, 그 이상으로 가장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신이기 때문이다. 악의든 선의이든 요즘의 비난은 '댓글'에서 맹렬하게 활동 중이다.  그 방향이 좋은 쪽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떠나 '비난'이 지금처럼 활성화된 적이 없다.  비난은 누가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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