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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은 운동장 둘레에는 개교 즈음에 심었다는 벚나무 고목들이 자라고 있다. 벚꽃으로 유명해서 꽃필 무렵이면 축제가 진행되는 곳 중 하나인 고장. 싸리비로 꽃잎을 쓸어 한 방향으로 몰아간다. 뒤돌아보면 감당할 수 없는 꽃잎들이 흩날리고 더러는 흩어져 있다. 당시는 국민학교 지금 초등학교의 청소 시간, 야외 청소를 울력처럼 하던 봄날 난감했던 기억이다. 감독은 동급생이었는데, 좀처럼 통과시켜주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러려니, 웃고 넘길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군사문화의 얼룩이 초등학교에까지 아로새겨진 때였고, 공정이나 이의제기는 통하지 않았다. 영화(1992)로도 제작된 소설(『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한 장면(유리창 닦기)을 언급해야 좀 실감이 날까.

'더하면 더 했지, 결코 덜하진 않았어!' 그 시절을 지켜본 아이의 동무가 마흔 살을 넘긴 어느 날 동창회 자리에서 건넨 소회란다. 아이는 서울에서 갓 전학을 온 '한병태'가 아니었다.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엄석대’(소설 속) 무리의 견제 대상이고 늘 지는 쪽이었다. ‘석대’는 육성회장의 아들이었고, 아이는 육상회비마저 제 때에 내지 못하거나 선생님이 슬쩍 내주시곤 했다. 육셩회장(育成會長), 근동의 유지, 알 수 없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기득권이며, 토호(土豪), 때론 정치인이라는 얘기였다. 


‘석대’는 단 한 번도 아이의 성적을 따라잡지 못했다. 석대의 난동이 왜 하필 아이에게 집중되었는지, 자꾸 생각해도 원인은 이것뿐이었다. 아이의 선생님들은 바로잡아주지 않았다. 바로잡아주지 ‘못하는’ 선생님도 더러 있구나! 희망을 만나기도 했다. 공부 오로지 공부밖에 없다, 힘이 더 센 것도 아니고, 부모가.. (이쯤하자) 아쉬운 것은 또 있다. 왜 반장을 성적순으로 맡게 했는지. 반장(선거) 때문에 새 학년 새 학기면 새로운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1학기도 그냥 석대가 하면 안 되나요?” 아이는 ‘못하시는’ 담임에게 청원하기도 했다.


“작가가 글을 쓸 때에는 읽을 사람을 머릿속에서 미리 정한다. 이른바 ‘독자의 상정(想定)’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쓸 때, 필자가 머리 속에서 정하고 있던 독자는 어린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글의 일부가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리면서 어린이 독자를 갖게 되었다.” -이문열, 머리말에서


어린이용으로 다시 써야 한다. 어린이들에게 맞게 문장 구조를 손보고 낱말을 바꾸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작가는 새로 펴내는 책(소설) 머리말에서 사정을 밝혔다. 이미 상정한 독자가 바뀔 수 있을까? 그렇게 독자의 연령층을 낮춘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라떼는’ 식 푸념 하나를 더 얹는 것 아닐까. 그렇게 소설은 애초에 상정한 대로(초판 출간 1987년), 작품 속 시절 전후를 살았던 독자들에게 ‘잔혹한 동화’로 평가받은 것 아니었을까. 이솝(아이소포스)이 살아 돌아와 21세기 한국 어린이를 위해 자신의 우화를 다시 쓸 수 있을까? 불가하다. <소설원론> 강의, 교수가 그랬다. 소설에서는 ‘작가의 말’까지도 액면 그대로 믿으면 안 됩니다. 이제 논픽션과 픽션의 경계는 거의 없다. 

 

“봄이었는지 가을이었는지 그해  서울에서 국제도서전이 있었어. 상당한 규모였지. 전단지를 무차별 살포하는 수준, 

부수가 장난이 아니었지. 거의 모든 판촉물이 들어갈 수 있는 가방, 배보다 더 큰  배꼽 사은품을 만들기도 했고.”

100만 부가 넘는 매체를 인쇄하는 중에 ‘사고’를 발견했다. 어른이 된 아이는 그 무렵 어느 매체의 팀장이었다. 담당 팀원(실무)들이 있고 바로 위에 과장, 그 위에 전결인 부장이 있었지만, 인쇄감리까지 맡은 실무책임이기에 캄캄해진 하늘이 무너지고 있었다. 간지로 끼워 넣은 엽서에서 발견한 오자(誤字). ‘벚나무’가 ‘벗나무’으로 인쇄되고 있었다. 대형 인쇄소 부근에서 거기 영업본부장과 식사를 하다가 발견한 것. 공교롭게도 엽서였다, 신규 독자를 가늠할 수 없는. 

어느 해 봄밤, 벚꽃이 만개한 여의도 축제 현장을 한 바퀴 돌고 해물파전에 막걸리를 마시면서 아이가 들려준 두 번째 이야기다. 나의 벗이 벚나무 아래에서 벗과, ‘벗나무’와 벚나무 사이에서 거듭 경험한 일종의 트라우마. 그날, 인쇄소의 영업본부장이 들려주었다는 위로의 한마디를 빠뜨릴 뻔했다. “가을날 공원에서 낙엽 쓸기와 같은 것 아닐까요(교정이란 것이).”

 

“플라톤은 여든에 죽을 때에도 여전히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아흔아홉까지 살았고, 아흔넷에 자신의 가장 유명한 작품을 썼다. 고르기아스는 두 사람을 한참 어린애로 보이게 하는데, 그는 백일곱 살까지 살았고 죽는 날까지 일에 매진했다.”(439면 마지막 단락)

<13. 보브와르처럼 늙는 법>을 읽는 중이었다. 다음 440면  중반쯤을 읽어가는데 뭔가 이상했다. 소크라테스가 99세까지 살았다고, 가장 유명한 작품을 남겼다고? 내가 아는 그 소크라테스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무심코 지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소크라테스를 하도 많이 만나(주석을 포함하여) (기원전) ‘469에서 399’라는 숫자가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튀어나오기 때문이다(출생을 기원전 470년으로 보기도 한다). 

생몰연대에 ‘9’가 유난히 많아 어느덧 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99세’까지를 지나친 이유이기도 했다. 내가 아는 소크라테스는 70년 전후를 살았는데……. 그런 소크라테스가 작품을 남겼단다. 이 소크라테스가 그 소크라테스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저자가 인용한 구절이, 언급하는 인물들까지 원본 텍스트(출처)가 키케로의 「노년에 관하여」(『그리스 로마 에세이』에 수록) 가 분명했다. 책을 찾아 살핀다. 마침 이 책(익스프레스)과 겹치는 부분이 있어 참고하던 참이었다. 예상대로 ‘이소크라테스’다. 


“이소크라테스(Isocrates, 기원전 436-338년)는 아테나이 웅변가로 그의 연설들은 실제로 연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읽히기 위하여 씌어진 만큼 일종의 에세이라고 할 수 있다.”( 「노년에 관하여」, 옮긴이 주석) 

요즘을 살아간다면 이소크라테스는 대통령 연설담당(Speech writer) 비서관이지 않을까? 그가 말년에 남겼다는 역작은 『판아테나이코스』다. 소크라테스(Socrates)는 평생 말(말씀)하였을 뿐이고, 한 것이나 하신 것으로 여겨지는 말씀을 담은 글(책)은 여든 살까지 살았다는 제자 플라톤이 남겼다.


실수는 할 수 있다. 하지만 바로잡기까지 너무 오래 걸리면 안 된다.  오탈자가 좀 있네요, 하면 될 것을 부러 글에 담는 이유다. 내가 읽은 책은 작년(2021년) 말에 인쇄된 21쇄 반양장(초판1쇄, 21년 4월 28일)이다. 25만 부 기념으로 발행했다는(2022-03-14) 양장본에 이 대목은 수정되었는지? 2장(소크라테스처럼 궁금해하는 법)만이 아니고 곳곳에 소크라테스가 출연하고, 제목에까지 소크라테스(마케팅)가 등장하는데, 치명적인 오류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주석은 길거나 짧거나 해당 페이지에 수록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생략했더라도(그곳 독서환경과 우린 다르다) 역주가 필요할 때가 있다. 그리고 해당 페이지에 주석이 없다고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그렇게  보일 뿐. 늦은 봄, 올해도 어김없이 벚꽃은 만개했다 한 달쯤 전에 졌는데, 친구의 아픈 벚꽃들까지 소환하다니, 쏘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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