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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메스님의 서재
  • 전태일 평전
  • 조영래
  • 11,700원 (10%650)
  • 2009-04-15
  • : 6,947

고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을 읽었다. 전태일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가 왜 그렇게 죽어야겠다고 결단했는지 나로서는 이해가 가질 않아서, 그리고 그러한 그는 대체 누구인가하는 의문이 들어 거의 충동적으로 읽게 되었다. 전태일 그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

그는 향년 22세 일기로 자신의 몸을 노동법과 함께 불살라 생애를 마쳤다. 그의 삶은 철저히 빈곤과 고통, 절망 그리고 상처와 멸시로 점철되어 있다. 아주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15살이 되기도 전에 각종 품팔이, 신문팔이로 거리를 전전하며 가난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았다. 찢어지게 가난한 삶, 아버지의 폭음과 폭력, 자신의 동생들을 책임져야하는 그러한 삶.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안위만을 염려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고통이 견딜 수 없을 정도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와 같이, 자기보다 더 한 고통의 삶을 사는 이들의 짐도 같이 짊어지는 그의 생애는 실로 인간을 초월한 삶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마저 들게한다.

 존재론의 철학자 혹은 실존철학의 대표적인 사상가로 알려진 마르틴 하이데거(M.Heidegger)는 삶의 비본래성과 본래성을 이야기했다. 비약의 정도가 있겠지만,퇴락으로 정의되는 비본래성이란 세인(Das Man)들 사이에 자신의 모습을 가리우고, 함몰된 채 소시민적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세인들이 쓰는 말들(Die Rede), 행위들, 심지어 생각들까지도 평균적으로 다를 바 없는 그러한 퇴락된 삶.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에 답하지 않는 그러한 삶. 보통의 사람들은 이러한 비본래적 삶의 양식들을 향유한다. 그러나 본래성, 본래적 삶이라는 것은 세인들 속에서 자기가 상실되는 것을 극복함과 동시에 이미 피투된 자기 자신을 기투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물어져오는 것에 대해서 회피하지 않고, 세인들 속에서 함몰되는 것에 대해 계속해서 불안을 느끼며, 자신의 필멸성(죽음)을 인지하는 그러한 삶. 자기극복이자 자기정립의 삶이 바로 그것이다. 하이데거가 이야기하는 이러한 본래적 삶을, 나는 전태일의 생애와 죽음을 보면서 느낄 수 있었다.

 그저 평화시장의 일개의 재단사로서 참혹한 노동현장의 부조리한 현실을 눈감고, '다른 이들처럼' 자신의 안위만을 우려했다면 전태일은 그렇게 불타는 고통 속에서 죽어가지는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기업주를, 그러한 기업주들의 착취가 벌어지는 그 노동현장을, 그러한 것들의 존재를 외면하는, 거대한 경제개발이라는 계획 아래에 불가피한 희생으로서 노동자들의 질병과 죽음, 그리고 고통을 정당화하는 그 부조리한 사회의 철옹성을 전태일은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사회에 던져져있는 자기 자신을 그대로 주어진 암담한 운명의 무게에 짓눌려 체념에 빠지도록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 그 거대한 사회를 상대로 투쟁했다. 그것도 자신의 단순한 억울함 때문이 아닌, 어린 티를 벗지도 못한 시다들과 고통받는 수많은 여공들과 노동자들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그렇게 초월했다. 자신 앞에 죽음이 닥쳐올 그 시점에도 자기가 살아 있을 적에 이루지 못한 노동개혁의 희망을 끝끝내 놓지 않은 전태일은 그렇게 본래적 삶의 대표적인 원형으로 남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대단한 이유는, 그가 이렇게 완벽하고 비범한 인물이었다기 보다 그 자신도 여느 인간들처럼 나약하고 두려움과 불안 앞에서 처절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여기서 투사 전태일의 죽음이 하이데거나 여타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강조한 삶의 방식이 가진 한계를 또 한편으로 극복해내었다고 생각할 여지가 남아있다고 하고 싶다. 대체로 실존철학들은 개인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비판을 전면으로 부정할 수 없다. 정치적, 사회적 담론에서 다루어지기에는 여타 사상들보다 비교적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성격을 가지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거대 담론에서 벗어나 개인의 실존, 삶의 방식을 강조하는 실존철학은 이렇듯 한계를 가지는 것이다. 하지만 전태일의 죽음은 단순히 실존적 측면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죽음으로 그저 착취의 대상으로서 체념과 절망으로 매일매일을 감동없이 그렇게 살아가는 노동자들에게서 자신들이 처해있는 부조리한 상황을 타개할 동기가 생겼던 것이다. 철저히 노동으로부터 소외되고, 타인들과의 단절되어 마치 기계처럼 고작 생존해있던 그들이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삶을 외치게 되었던 것은 전태일의 죽음 때문이었다. 전태일의 분신의 행위, 그의 죽음은 일견 자기극복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사회 개혁의 촉발 사건이자 시대의 변혁을 일으키는 거대한 사건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에서 전태일은 실존적 삶의 현시이자, 그 자체로 혁명의 주체였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노동자로서 당당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여건을 개선하라!', '나의 죽음을 헛되이 말라!.'- 전태일의 진정한 숙고와 부조리와의 투쟁에서 비롯한 유언들 때문이다. 

 사회를 변혁하는 것, 고통들의 울부짖음, 죽음의 참혹한 단말마들의 종말은 작금의 상황처럼 이데올로기적 투쟁과 승리에서 기대해볼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아니 자신과 함께 고통받고 있는 이들의 처지와 딛고 있는 땅을 직시하고, 그것을 극복해내기 위해 자신을 던지는 가능적이고 실존적인, 희생적인 삶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전태일을 통해서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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