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언니 덕분에 또래 친구들보다 일찍 라디오를 접했다. 언니가 중학생이고,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일 무렵, 친구들이 구구단 외우면서 산수(그때는 수학이 아니라 산수였다) 숙제하고 있을 때, <두 시의 데이트>를 들으며 알지도 못하는 팝송을 흥얼거리고, 어느 광고에 나오던 음악에 귀를 열었다. 마치 내가 친구들과 다르다는 듯이, 친구들과 방과 후 학교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게 심심한 일이라는 듯이, 라디오 이야기를 하면 TV 만화 프로그램 이야기가 이어지는 게, 마치 아이들 같다는 듯이. 그때의 나는 아이였으니, 아이들의 세상에서 당연히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었는데도, 그 아이들 틈에서 나만 혼자 훌쩍 커버린 건방진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웃긴 일이었다. 그래도 그때의 습관 때문인지, 그 후로도 여전히 라디오를 들으면서 자랐고, 집안의 고요함이 싫을 때도 TV보다는 라디오를 켜 놓는 습관은 여전하다. 지금은 그 라디오를 듣는 시간이 훨씬 줄기는 했지만, 그래도 TV보다 라디오가 편한 건 어쩔 수 없다.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사연 한 줄이, 갑자기 눈에 들어온 책 속의 한 문장 같을 때가 있다. 라디오와 책, 느낌이 닮았다.
‘겨울밤’과 ‘라디오’처럼 잘 어울리는 조합이 있을까. 게으름에 미뤄둔 책이지만, 이 추위에 제법 잘 어울려서 며칠 밤 계속 읽은 책이다. 며칠 동안 읽어야 할 정도로 두꺼운 책이 아니었건만, 지독한 감기에 두꺼운 이불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시간이 많아지니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 않았다. 그런데도 피식거리면서 계속 페이지를 넘기게 되는 건, 저자가 살아온 세월 속 라디오, 그 시절 속의 이야기를 모르지 않아서다. 저자의 정확한 나이를 모르겠지만, 아마 나와 비슷한 또래가 아닐까 추측해본다. 일찌감치 라디오를 접했고, 라디오를 좋아해서 겪은 에피소드에 안타까움과 웃음이 저절로 났다. 그때의 라디오 프로그램이 낯설지 않아서 흠칫했다가, 설명하기 어려운 그리움까지 묻어났다. ‘그땐 그랬지’ 같은 느낌.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 다시 돌아갈 수 없을까 싶은 아쉬움까지, 괜히 오늘의 추위에 우울한 기분까지 밀려와서 옆에서 누가 꾹 찌르기라도 했다면 눈물까지 날 뻔했다. 20년 넘게 방송작가로 일해온 사람이 전하는 라디오 이야기의 힘이 이런 건가.
라디오 덕분에 얼마나 행복했을지, 저자의 이야기를 들으면 저절로 알게 된다. 라디오 공개방송을 들으면서 울고 웃고, ‘워크맨’(요즘 세대는 이걸 알려나?)이 소중했던 시절을 건너와 방송작가가 되기까지의 이야기가 생생하다. 라디오 때문에 행복했는데, 라디오가 좋아서 방송작가 되어보니 라디오 때문에 절망했던 순간이 따라오더라.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된 건 부러웠는데, 그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고 보니 고통스러운 순간이 또 생기더라는. 이러면 안 되는데, 좋아하는 건 계속 좋아하는 채로 남아주어야 하는데, 꿈이 이루어졌는데 왜 절망이 따라오는 건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 어쩔 수 없는 이런 순간을 또 버텨내야 하는 거라면 어쩔 수 없지만, 괜히 또 서글퍼진다. 그래도 좋았다. 주파수를 열어놓고 있을 누군가에게 안부를 전하고, 누군가의 힘들다는 한마디에 위로를 담은 답 문자를 보내고, 그 문자 한 통에 또 힘을 내며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기뻤다.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는데도 이런 안부를 묻는 게 가능하다는 건, 라디오가 가진 힘일 거다. 나 역시 그 힘을 나눠 받으며 살았으니, 그저 고마울 수밖에.
제목을 정확히 모르겠지만 계속 흥얼거리게 되는 음악이 있다. 어느 광고에서 들려오던, 익숙한 음악에 계속 반복되는 구절이, 일부러 떠올리지 않았는데도 불쑥 튀어나와 자꾸 맴도는 음악. 평소에 ‘중독성 있는 음악’이나, ‘훅송(Hook Song)’으로 불리는, 때로는 ‘수능 금지곡’이라는 위험한 이름이 붙여진 정도로만 생각했던 음악을 부르는 단어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귀벌레. ‘마치 귀에 음악 소리를 내는 벌레라도 들어온 것처럼, 그 벌레가 귀에서 나가지 않는 것처럼 특정한 노래나 멜로디가 귓가에 맴도는 현상을 두고 ’귀벌레 증후군’이라고 한단다. 이름은 좀 징그럽지만, 이런 이름이 붙여진 게 이해되기도 한다. 일부러 듣고 싶지 않은 순간에도 귀에 머물러서 계속 맴돌고 있다는 게, 심지어 입으로 종일 흥얼거리게 되는 그런 음악에 붙여진 이름. 아이러니하게도 이 귀벌레가 부르지 않아도 어느 날 불쑥 찾아오는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는 게 웃기긴 하다. 라디오 프로그램은 사연 사이에 들어오는 음악과 함께였기에, 이런 에피소드가 따라올 때도 있는가 보다. 덕분에 나도 새로운 단어를 알았다. 귀벌레 증후군이라니. 계속 입으로 소리 내어 말해보는데도 익숙하지 않지만, 쉽게 잊히지도 않을 것 같다. 요즘 나의 귀벌레 노래는 김필의 ’다시 사랑한다면‘이다. 집안에서도 밖에서도, 소음이 심했던 병원의 대기실에서도, 책 속 문장에 시선이 머물러 있어도 귀에서는 이 노래가 자꾸 들려온다. 심지어는 며칠 푹 빠져 있었던 OTT 드라마 <이 사랑 통역 되나요>를 보는데도 계속 들렸다. 이 정도면 좀 심한 거 아냐? 때가 되면 귓가에서 사라질 목소리겠지만, 들리는 동안에는 뭐, 그냥, 즐긴다고 생각하고 있어 보지 뭐. 나중에 언젠가 이 노래가, 이 목소리가 그리워질지도 모르니까.
일상의 어느 곳에서나 접할 수 있는 라디오였다. 최근 경험했던 단순노동의 현장에서도 일정 주파수에 맞춰진 라디오가 계속 켜져 있었고, 어느 사연에 박장대소하다가 누군가의 슬픔에 고개를 끄덕이며 위로했다.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사연에 살아가는 게 다 비슷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같은 공간에 있던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 버스 안에서 들려오는 라디오가 좋았고, 병원에서 지루한 대기 시간을 버티게 해주는 이어폰 속의 DJ 목소리가 반가웠다.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닌 느낌을 전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인간은 본디 외로운 존재라고 했는데, 그 외로움을 즐기면서도 때로는 감당하기 어려워질 때마다 라디오를 찾게 되는 것 같다. 누군가 거기 있다는 생각에, 우리의 외로움은 이 주파수에 맞춰 서로 통하고 있다는, 유치하게 들릴지도 모르는 이 믿음에 힘을 실어보기도 한다. 하고 싶은 말 다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많은 순간에, 대놓고 말하지 못해서 속이 터져나갈 것만 같을 때, 누가 내 얘기 좀 들어줬으면 싶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나무숲이 라디오였다. 지금은 익명 게시판을 비롯해 여기저기 마음을 토해낼 공간이 많이 있지만, 그 시절의 우리에게 라디오는 마음상담소 역할을 톡톡히 했다.
’라디오 로맨스‘의 대표주자 같은 소설 속 로맨스는 현실에 없었다. 방송국이 배경이 된 드라마 속 로맨스도 없었다. 몰라서 기대하는 게 아니라, 전쟁통에도 사랑이 있다는 말처럼, 전쟁 같은 일터에서도 사랑을 있을 테니까, 좋아서 하는 일에도 절망은 따라오니 뭔가 설레는 일 하나쯤 같이 있어도 좋지 않을까 하는 바람 같은 게 아닐까. 살면서 때로 환상 같은 일도 생겨주면 좋잖아. 어쨌든, 나에게 라디오는 그 단어 자체로 포근해지고 정적인 분위기를 전하지만, 현실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그저 치열하게 살아가는 하나의 공간이 된다. 어디든 마찬가지겠지만, 낭만으로만 떠올릴 수 있는 곳이 아니게 되었다는 거다. 어렸을 적 뭣 모르고 두근거리기만 했던 라디오는, 어른의 세상에서 그 두근거림이 계속 이어질 수 없는 곳이 되었다는 게 아쉽고, 뭐, 그렇다. 그래도 놓을 수 없게 하는 그 무엇이 여전히 우리 곁에 라디오를 남겨 둔다. 저자의 말처럼 ’영원히 외롭지 않을 거‘라는 말보다 ’우리는 내내 외로울 것이나 때론 어떤 존재와 온기로 생의 고독을 잊을 수 있을 거‘라는 말이 더 좋아서 함께 하고 싶어진다. 지금처럼 울고 웃는 인생을 살아갈 것이고, 그 틈틈이 외로울 것이고, 그때마다 슬쩍 그 외로움을 토해내고 싶어질 거다. 누군가 부담 없이 그 마음 들어주길 바란다면, 그건 아마도 라디오가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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