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결혼을 유지하는 여자는 가끔 상상한다. 집을 떠날 때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으면 어떤 기분일까 하고. 뭐, 이런 상상 할 수도 있지. 그런데 소설의 첫 문장은 그녀가 행복한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게 맞는지 의심하게 한다. 지금 이 결혼생활이 너무 행복한데 다른 남자와 자고 싶은 상상을 한다는 게 흔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이 가정에서 자기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고, 남편과 아이들을 함께하는 시간이 소중하지만, 그녀에게 꽉 채운 행복을 주지는 못하는 듯하다. 단편 「남극」의 여자는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며 남편과 아이들 선물을 사러 도시로 갔다가 일탈을 경험한다. 평소와는 다른 옷차림으로 술집을 갔고, 거기에서 한 남자와 술을 마시고 그의 집으로 간다. 남자는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해주었고, 여자는 집에서 받지 못하는 대접을 이 남자에게서 받는다. 그렇게 하룻밤의 꿈 같은 일로 끝나면 좋았을 텐데, 여자의 일탈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와, 이 다정한 남자의 행동에 나도 반할 뻔했다. 항상 집에서 여자가 해왔던 일을 다른 사람에게서 받고 있을 때 얼마나 편안하고 행복할까. 그래서 더 긴장하지 않았던 걸까. 이 단편 보면서 더 끔찍한 생각이 들었던 건, 여자가 꿈꾸었던 작은 바람 하나가 이루어졌을 때 이런 결말을 보여주는 건 무슨 의미인가 싶어서다.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을 해서 그런 거라고 경고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여자가 무슨~’ 이런 사고방식에 그녀가 벌 받은 거라고 심판을 내리는 걸까. 나 정말 이 단편 보면서 좀 아주 무서웠다. 세상이, 남자가 너무 무서웠다고.
표제작 「너무 늦은 시간」의 주인공 남자에게서는 진짜 뭐랄까, 이 남자 어떤 여자를 만나고 연애하면서 서로 마음을 나누고 결혼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궁금했다고 해야 하나. 평소처럼 출근한 남자에게 동료들은 안부를 묻는다. 그냥 아침에 얼굴 본 사람에게 전하는 인사 정도로 여겼다. 반전은, 원래대로라면 오늘은 남자의 결혼식이 있는 날이었다는 거다. 그럼 결혼식이 취소됐다는 건가? 남자는 여자를 만나서 연애했고, 이 만남은 자연스럽게 결혼하기로 하는 과정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남자가 여자에게 갖는 생각과 여자가 남자에게 바라는 마음이 어긋나곤 했다. 항상 여자가 장을 보면서 계산했는데, 어느 날 여자는 지갑을 두고 왔고 그때 장을 본 것을 남자가 계산했다. 남자는 그날의 일을, 자기가 쓴 돈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아차 싶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때까지 차곡차곡 쌓아왔던 다름이 여자의 마음에서 폭발한다.
여자가 참 오래 참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남자를 계속 만나야 하는지 그만 헤어져야 하는지 수도 없이 생각했을 텐데, 그래도 혹시나 변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그 결정을 미루게 한 건 아닐까 추측해본다. 일말의 기대 같은 거 말이다. 나아지겠지, 서로의 생각을 조금씩 이해하고 양보하면서 맞춰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남자는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그동안 드러내지 않았던 민낯을 계속 보여왔던 듯하다. 어릴 적 집에서 어머니와 아버지, 동생이 함께 지내면서 엄마에게 했던 행동들이나 사고방식을 떠올리면서 후회하지만, 그때는 늦었다. 자라면서 봤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어떻게 했는지 봐왔던 삶의 태도는 어느새 그의 몸에 깊게 새겨져 있던 거다. 그러고 보니 그를 떠났던 여자가 오히려 현명한 결정을 내린 게 아닌가 싶어질 정도다. 이혼보다 파혼이 낫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요즘은 좀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당신 또래의 남자 절반은 그냥 우리가 입 닥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주길 바란대. 남자들은 제멋대로 살아서 뭐든 자기 마음대로 안 되면 한심하게 군대.”
(중략)
“그거 알아? 내가 이 집에서 저녁을 만들었을 때 당신은 고맙다는 말을 한 번도 안 했어. 식재료를 산 적도 없고, 아침 식사를 차려준 적도 없어.” (37~38페이지, 「너무 늦은 시간」)
유명 작가의 하우스에서 머물며 글을 쓸 기회를 얻은 여자가 있다.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 속 여자는 이 기회를 이용해 그녀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을 기세다. 그런데 어떤 남자가 이 집을 찾아와서 좀 보고 싶다고 한다. 미리 약속도 없이, 그녀의 일정을 무시한 배려를 할 수 없기에 다시 찾아오라고 한다. 저녁에 다시 찾아온 남자는 여자가 배려한 상황을 무시한 채로 멋대로 단정하고 판단하면서 여자에게 핀잔을 준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남자는 여자에게 막말을 퍼붓기 시작한다. 당신이 뭔데? 왜? 여자가 유명 작가의 하우스에 머물 기회를 얻은 건 정말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이뤄낸 일이다. 마치 감시자처럼 찾아와서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다. 왜 이렇게 예의가 없지? 남자는 여자가 내놓은 케이크를 처먹고 차를 마시면서도 손님 대접을 해준 것을 고마워하기는커녕 한껏 질책하고 떠난다. 처음 보는 여자에게, 막무가내로 와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떠나는 중에도 욕을 해대고 있는 이 남자가 가진 권력이 무엇이기에.
불균형한 권력관계를 말하는 듯하지만, 그 불균형이 유지되어왔던 건 어느 한쪽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오랜 세월 그런 희생이 강요처럼 이어져 오면서 당연하게 뿌린 내린 결과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세대 사이의 갈등, 남자와 여자 사이의 불평등한 여러 가지 문제가 역사와 문화, 관습적으로 계속된 게 이유라면, 이제는 그 이유를 파헤쳐 앞으로의 삶을 위한 변화가 답이 아닐까.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무너뜨리는 균형의 아름다움을 찾아와야 할 때인 듯하다. 작가의 전작들을 떠올리면 고요하면서도 무게가 있었다. 조용히 물 흐르듯 흘러가는 이야기 속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정확했고, 독자에게 그대로 전달되곤 했다. 그래서인지 이번 단편집도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충분히 이해했다. 소설 속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현실적으로 생생한 내용들이어서 재미와 충격을 느끼게 하는 작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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